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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정답 밝힌 故계훈제 선생님 - 언론인 김중배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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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계훈제 선생님. 선생님이 남긴 온 삶의 초상은 겨레의 스승, 겨레의 길잡이로 그려집니다.

돌이켜보면 역사의 굽이굽이마다에서 선생님이 온 몸으로 밝힌 겨레의 살 길은 모두가 어김없는 정답이었습니다.

일제의 질곡을 무너뜨리기 위한 반제.반식민지 투쟁은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겨레의 살 길이었습니다.

민족 분단의 겨울을 맞아서는 남북의 평화통일 추구를 넘어설 만한 정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군부독재의 어둠 속에 갇힌 겨레는 당연히 반독재 민주화의 깃발을 올려야만 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 정답의 깃발을 앞장서 나부끼는 현장의 전사였으며 현장의 스승이었습니다.

멀리서 뒤따르며 거듭 확인했던 또다른 선생님의 초상은 더불어 나아가기로 그려집니다.

필경 내면의 풍경과도 이어졌을 흰 고무신과 노타이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언제나 독선과는 거리가 먼 어른이었습니다.

손에 손을 마주잡고 뜻있는 겨레가 사슬이 되어 더불어 나아가는 길을 이끌었습니다.

물론 너무나도 긴 시간의 지체가 있었습니다만 선생님이 밝힌 살 길의 정답과 겨레의 사슬은 마침내 역사의 바른 기초를 열어내는 듯이도 보였습니다.

때문에 선생님은 정답의 화신이라는 믿음을 더욱 굳혀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병상에 갇힌 사이, 그리고 선생님이 눈을 감은 그 무렵 이 땅엔 다시 선생님의 정답을 기다려야 하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언론들은 '5공이 돌아온다' 는 발굽소리를 요란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IMF시대의 소용돌이는 기능적 지식인을 '신지식인' 으로 떠받드는 퇴행의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시장주의의 처세술에 능통한 지식인들만이 시대에 걸맞은 지식인인 양 찬미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비 따위의 낱말은 언제 사전에서 추방될지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민족과 민주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깃발을 나부끼며 행동하는 지식인은 설 자리를 잃어가는 듯이 보입니다.

선생님. 계훈제 선생님. 이 시대에 정답을 듣고 싶습니다.

아니, 살아남은 후생들은 끊임없이 선생님의 초상을 떠올리며 선생님의 정답을 들어낼 것입니다.

고이 잠드소서.

김중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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