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 만선' EU호 집행위 전원 사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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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유럽연합 (EU) 이 비틀거리고 있다.

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 20명 전원이 16일 전격 사임했다.

이날 공개된 집행위 부패조사 결과에 공동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집행위원회는 EU의 행정기관이자 실질적인 입법기관.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집행위가 공중분해됨으로써 EU는 사상 초유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됐다.

◇ 사임 배경 = 집행위 내부의 부정부패와 허술한 관리능력은 지난해부터 도마 위에 올라왔다.

유럽의회는 1월 집행위에 대한 불신임안을 상정했지만 이를 부결시켰다.

집행위원 전원에 대한 불신임안이 가결될 경우 예상되는 파국을 고려한 정치적 타협이었다.

의회는 대신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 집행위에 대한 특별감사를 실시해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1백44쪽의 보고서는 "집행위 내부에 만연한 예산 유용 등 부정을 통제하지 못한 중대한 과실이 인정된다" 고 밝히고 있다.

집행위 사임은 표면적으로는 이처럼 부패 통제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는 형식이다.

하지만 실상은 집행위와 유럽의회간의 힘겨루기 성격이 강하다.

6백26개 의석의 유럽의회는 EU에서 유일하게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기관. 하지만 역할은 집행위에 대한 자문 정도에 그치고 있다.

유럽의회는 93년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97년 암스테르담 조약에 의해 권한이 점차 강화되면서 집행위 견제의 칼을 갈고 있다.

회원국간의 이해 차이 역시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올해 EU의장국인 독일은 자국의 EU 예산분담금을 줄이는 데 반대하는 일부 집행위원들의 비리 사실을 은근히 흘렸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 향후 전망 = 집행위 전원 사임이라는 예기치 못한 결정은 EU 15개 회원국들을 심각한 정치적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올해 출범한 단일통화 유로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동유럽권으로의 EU확대를 겨냥한 재정개혁 문제 등 현안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EU 회원국 정상들은 9백30억달러 (약 1백12조원)에 달하는 EU 재정개혁 문제 (아젠다 2000) 를 논의하기 위해 24일 베를린에서 회동한다.

이 자리에서 회원국 정부가 임명하는 새로운 집행위원들을 구성하기 위한 논의도 있을 예정이다.

그때까지 현 집행위원회가 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새로운 팀이 구성돼도 집행위원회의 권위 손상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회원국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신뢰성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집행위원회의 존재 없이는 유럽통합 일정을 과감하게 밀고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각국 정부는 집행위 사임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영국은 자국 출신의 집행위 부위원장인 리언 브리턴경과 닐 키녹 수송정책담당 집행위원을 재임명할 뜻을 강력하게 밝히고 있다.

다른 회원국들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결국 문제가 됐던 에디트 크레송 교육담당 등 몇몇 집행위원을 제외한 대부분이 재임용돼 5년 임기의 새로운 집행위가 구성될 전망이다.

이훈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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