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문명의 충돌, 문명의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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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동서냉전은 끝났지만 세계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냉전시대보다 더 불안하다.

구질서는 무너졌으나 신질서가 아직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전후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들 가운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문명의 충돌론 (論) 이다.

미국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과 세계질서의 재편' 이란 책에서 세계정치가 문명권 (圈)에 따라 재구성되고 문명과 문명 사이의 단층선 (斷層線) 이 갈등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갈등의 핵심은 서구문명과 비 (非) 서구문명의 대립이다.

비서구문명을 구성하는 두 개 축 (軸) 인 아시아와 이슬람은 개별적으로, 때론 힘을 합쳐 서구문명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아시아의 자기주장은 경제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눈부신 경제발전은 아시아인의 잃어버린 자긍심을 되살리고 있다.

그 증거가 아시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화적 르네상스다.

한편 이슬람의 부흥은 사회적 동원과 인구증가에서 비롯한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더 이상 극단세력의 고립된 주장이 아니다.

이슬람 국가들의 높은 인구증가율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청년인구는 원리주의의 강력한 지지기반이다.

헌팅턴은 아시아의 경제성장과 이슬람의 인구증가가 앞으로 '수십년 동안' 과거 서구가 주도해 온 세계질서에 큰 불안요인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특히 서구와 이슬람 사이에 '역사적 반목' 이 다시 불거지고 있으며, '준 (準) 전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미국이 '테러국가' 로 지목한 7개 국가들 가운데 5개국이 이슬람 국가다.

문명의 충돌론에 대한 이슬람의 시각은 서구의 세계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적 치장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온건파 합리주의자인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은 '희망과 도전' 이란 책에서 미국 중심의 현재의 세계질서는 폭압적이고 불공정한 식민주의의 연장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서구문명에 포함된 자유.자율 등 인간의 고귀한 이념을 인정하고, 이슬람이 가진 편협한 종교적 도그마에 대해 냉철한 비판을 가한다.

지난해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문명의 충돌 아닌 대화' 를 역설했던 하타미 대통령은 이번 이탈리아 방문에서 국가간 상호신뢰에 바탕을 둔 신 (新) 데탕트를 선언하고,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도 만났다.

21세기가 전쟁의 시대 아닌 평화의 시대가 되기 위해 인류는 문명간 높은 벽을 허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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