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IMF 분해']벌이도 씀씀이도 정서도 '양극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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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특정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초기 주로 자산과 소득 부문에서 시작된 이 현상은 소비지출.기업마케팅.문화.국민정서에까지 번지고 있다.

◇ 부익부 빈익빈 = 인터넷 관련회사 골드뱅크 커뮤니케이션스의 김진호 (金鎭浩.31) 사장은 요즘 나름대로 호사를 부린다.

2년 전 설립한 회사가 경제위기 속에서도 지난해 매출이 4배나 는데다 코스닥에 등록한 주식가격이 치솟으면서 30억원대의 재산가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金사장은 70만원이던 자신의 월급을 올들어 9백만원으로 올리고 그랜저XG도 샀다.

"경쟁업체들을 시장에서 퇴출시켜준 IMF가 내겐 일등공신" 이라고 그는 말한다. 반면 '20~30평형대 아파트 한채와 승용차' 로 상징되던 대다수 중산층은 지난해 실직과 임금하락으로 소득이 20%가량 줄었으며 집값이 떨어져 자산 디플레까지 겪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도시근로자 가구의 최상위 20%는 월평균 1백65만7천원의 흑자를 기록한 반면, 최하위 20%층은 5만3천9백원의 적자를 보았다.

자산을 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현금부자들은 고금리로 재미를 톡톡히 봤다.

97년 4천만원 이상 금융소득을 올린 종합과세 대상자는 4만4천2백76명. 지난해엔 금융소득 종합과세가 유보돼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98년 상반기까지 이어진 고금리를 감안할 때 10만명을 넘을 것" 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현금부자들이 고금리로 흥청거릴 때 빚 많은 서민들은 높은 대출이자로 고통을 겪었다.

올봄 실업률이 최고치에 이르면 저소득층이 더욱 양산될 전망이다.

특히 장기실업이 크게 느는 게 문제다.

노동연구원 신동균 연구위원은 "전체 실업자 중 6개월 이상 장기실업자가 지난해엔 평균 15.6%였으나 올해는 소폭의 경기성장에도 불구하고 27.4%쯤으로 높아질 것" 으로 추산했다.

◇ '중간' 이 빠진 소비 = 소비지출의 양극화는 중가 (中價) 제품의 고전에서 잘 드러난다.

현대백화점의 지난해 4분기 판매실적을 보면, 젊은층 중심의 대표적인 노세일 고가브랜드 '오브제' 와 '마인' 은 매출액이 97년 같은 기간보다 30%이상 늘었다.

고가의 진 브랜드 '닉스' 도 17%가량 매출이 증가했다.

저가품 역시 불티나게 팔렸다.

자동차의 경우 올 1월 국내 판매량 5만5천8백95대 가운데 경차는 1만4천6백54대로 전년보다 37.2%가 더 팔렸다.

하지만 중가품은 사정이 다르다.

LG전자의 경우 97년 상반기 판매량의 35.1%를 차지했던 중급형 21.25인치 TV가 올 1월엔 17.7%로 비중이 뚝 떨어졌다.

20인치 이하의 저가품이 35.3%에서 41.2%로, 29인치 이상의 고가품이 6%에서 12%로 급상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같은 현상은 거의 모든 부문에서 나타난다.

당연히 업체들의 마케팅도 고급형.보급형 양극 중심으로 변해간다.

지난해 31종의 TV를 만들었던 삼성전자는 올해엔 20종만 생산할 예정이다.

퇴출 모델의 상당수가 중가품이다.

서울 강남의 고소득층을 겨냥한 상품.문화정보지 '노블레스' 의 이원순 총괄본부장은 "고가 수입브랜드들은 IMF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반면 어중간한 브랜드들은 대부분 퇴출됐다" 고 말했다.

◇ 문화.정서의 양극화 = 대우자동차 朴모 (32) 대리는 지난해 가족동반 나들이를 한 기억이 없다.

돈도 돈이지만 좀체 놀러갈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 "언제 실직할지 모르는데 문화생활 운운은 사치 아닌가.

휴일이면 거의 집에 틀어박혀 비디오를 본다.

요즘 얘기들 하는 'IMF 코쿤 (고치) 족' 이 된 셈이다" 고 그는 말했다.

반면 서울 청담동은 IMF체제 이후 본격적인 '신 (新) 여피 거리' 가 됐다.

매달 한두군데씩 퓨전재즈 카페와 레스토랑이 생겨나면서 이색문화 지역이 된 것이다.

이곳의 고소득층 고객들은 스스로를 주저없이 '코피 (코리안 여피)' 라고 부른다.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의 '국민 문화향수 실태조사' 를 보면 IMF 이후 서민층의 가구당 월평균 여가비용은 16만4천원에서 10만9천원으로 줄었다.

이들이 민박을 이용하며 저비용 레저를 다니는 사이 일부 고소득층은 보름에 7백만원을 내는 패키지 해외여행을 즐겼다.

연평균 영화관람 횟수도 월소득 1백만원 이하인 가구가 1.98번인 데 비해 소득 3백만원 이상의 가구는 4.92번이다.

이런 현실에 맞춰 문화마케팅도 양극화 전략을 쓰고 있다.

지난해 11월 '오페라 페스티벌' 을 개최한 예술의전당이 대표적인 예. 예전엔 1만~6만원 사이에 서너 등급이 있던 관람료 체제를 15만원짜리 VIP석과 7천원짜리 대중석을 양축으로 한 방식으로 바꿔 국내 오페라 공연사상 최다관객을 동원했다.

"VIP석은 더 고급화해 특급호텔이 만든 저녁식사와 가족사진 촬영권 등을 제공하고, 대중석은 영화요금 수준으로 내린 것이 주효했다" 고 담당자는 밝혔다.

고려대 현택수 교수 (문화사회학) 는 "문화복지 개념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상류층과 중하류층 사이의 문화소비 격차는 자꾸 벌어질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국민정서도 양극단을 달렸다.

고소득층이 IMF체제의 '부익부' 효과를 내심 즐기는 사이 어려워진 중산층과 저소득층엔 복고바람이 불었다.

'가난했지만 인정 많았던' 과거에서 위안을 찾고자 하는 도피심리 때문이다.

공연.음반.가요.방송.광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50년~70년대의 과거가 향수 (鄕愁) 로 포장돼 인기를 끌고 있다.

기획취재팀 하지윤.왕희수.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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