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끝나지 않는 모방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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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매주 일요일 정오 TV뉴스가 끝나면 일본의 NHK방송은 전국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내보낸다.

똑같은 시간대에 뉴스를 마친 한국의 KBS도 비슷한 제목의 방송을 시작한다.

수십년 동안 계속돼 온 장수 프로그램이다.

양국 노래자랑 무대의 등장인물과 내용구성도 닮았다.

10대의 록 음악과 30~40대의 대중가요 그리고 60~70대의 전통음악을 끼워넣고 향토 자랑도 한다.

두 나라 시민가수들의 '끼' 발산도 대단하다.

다른 게 있다면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출연자들의 모습이다.

한국쪽의 화장과 의상이 화려한 반면 일본쪽은 지극히 수수하다.

제3국인이 양국 TV를 오랜 기간 시청했다면 십중팔구 한국의 일본화 모델로 이 프로그램을 주제로 삼을 것이다.

최근 일본의 아시아경제연구소는 매우 중요한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 90년 이후 일본인들이 작성한 2만여건의 한.일 관계 문헌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일이다.

외무성 지원으로 시작된 이 사업이 올 가을에 끝나면 전후부터 89년 사이에 있었던 5만여건도 컴퓨터에 축적하는 일이 계속된다.

이 작업의 특징은 한국인들도 인터넷에 들어가 이 자료를 한글로 해득할 수 있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두 나라 정치관계에서부터 경제.사회.역사.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자료들을 컴퓨터에서 대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국인이 전후부터 기록 작성한 15만여건의 한.일 관계사 자료는 한국내 곳곳에 흩어져 있어 국내 이용자들이 체계적으로 접근하기가 힘겹기만하다.

어느 누구도, 어느 기관도 이 자료들을 집합시킬 의욕이 없어 보인다.

양국간 정치.경제관계는 더욱 확대되고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체육.문화 행사도 줄을 잇고 있다.

투자협정이나 자유무역지대 설치 논의가 거듭될수록 정보 요구량도 더욱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상당기간 한국인이 한국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일본의 데이터베이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이 일본화 되는 또하나의 출발점이다.

한국이 일본을 모방하고 일본 자료에 의지하는 것은 4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미국 흉내나 미국 자료에 매달린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문제는 한국의 모방기간이 전후 50년을 훨씬 넘어섰으며, 21세기에 들어서도 일본자료에 더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전개다.

일본과 거래가 많은 기업.문화인들의 반성은 두가지로 모인다.

첫째는 성공한 일본 사례를 따르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한국 기업조직의 생리다.

일본 모델 도입으로 위험부담이 줄었다고 자위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공 가능성이 작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로 베끼다 보니 아이디어의 선도 (鮮度) 도 떨어진다.

둘째는 기획 아이디어가 도둑질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가 실명 (失命) 됐나 싶더니 어느 틈엔가 제3자의 이름으로 빛을 보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가 옳게 평가받는 방법을 강구해야 일본 모방이 줄어든다는 해석이다.

일본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국제문제 관련 세미나는 늘 초만원을 이룬다.

주최측은 사전에 방청희망자들의 신청을 받아 '당첨' 된 사람들에게만 입장권을 보낸다.

참석자들은 열심히 메모하고 질문한다.

시민대학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유료인 세미나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신문사가 주최하는 국제.경제문제 해설강좌에도 입장료를 지불하고 경청한다.

새로운 정보에 대해서는 당연히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한국의 국제회의 주최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청중동원에 늘 골머리를 싸맨다.

이마저 유료로 했다간 회의장에 패널리스트만 연단에 남아 있게 될 판이다.

우리는 정보나 자료가 아직도 공짜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의 식견이나 아이디어는 이런 방청석에서 얻은 정보의 파편을 주워 모으고 분석하면서 얻은 결정이다.

그것이 한편의 문헌이 되고 데이터베이스화된다.

일본의 한국.한국인 연구는 한국의 일본.일본인 연구보다 훨씬 수월하고 값도 싸다.

한국인은 입이 가볍고 헤프지만 일본인은 무겁고 앞뒤를 잰다.

한국인의 입에서 나온 것들은 걸러지지 않은 생생한 정보이기 십상이다.

국가 단위의 정보교환 측면에서 보면 이건 분명한 불균형거래다.

그러나 그 책임은 한국인의 기질에 물을 수밖에 없다.

일본 정보의 숲에서 헤매고 모방과 표절의 세계에서 만족하는 한 우리의 앞날은 결코 밝지 않다.

최철주 신매체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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