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이스라엘-미국 사법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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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주 이스라엘 대법원의 한 판결이 많은 미국인들을 화나게 했다.

2년전 잔혹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한 미국 소년이 이스라엘로 도망갔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곳 시민권을 받은 뒤 자국민의 범인인도를 금지한 이스라엘법에 의거해 미국의 재판을 거부했다.

이 주장을 이스라엘 대법원이 승인했다.

두 나라는 범인인도조약을 체결한 사이다.

이스라엘에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미국으로 도망가면 미국측은 범인을 인도하게 돼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미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미국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는 자기네 국내법에 따라 그 인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측 분노에 당황한 이스라엘 정부 관계자들은 이 소년이 이스라엘 법원의 엄정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한다면 증인 출석 등 어려운 문제가 많다.

그리고 유죄가 입증되더라도 살인죄에 대한 이스라엘의 형량은 미국보다 훨씬 가볍다.

미국에서라면 무기징역을 면할 수 없는 이 소년의 범죄가 이스라엘에선 최고형량이 20년 징역이다.

재판관할권의 평등성은 국가간 평등관계의 첫번째 요건이다.

제국주의시대에 강대국이 약소국에 강요하던 불평등조약의 상징이 치외법권이었다.

강대국 시민은 약소국에서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본국의 보호를 받았던 것이다.

아직도 아쉬운 점이 많은 주한미군의 재판관할권 문제는 주권국가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런 치욕을 미국이 이스라엘로부터 겪고 있는 것이다.

묘한 일하나가 지난 달에 또 있었다.

미국 이민국이 카슈티란 이름의 이스라엘인을 송환대상자로 체포했다.

이스라엘 범죄조직의 일원이던 이 노인은 미국 검찰에 정보와 증언을 제공한 대가로 6개월 자택연금의 가벼운 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민국은 체류외국인이 유죄판결을 받으면 체류자격을 박탈하는 이민법에 따라 그를 송환하겠다는 것이다.

조직을 배반한 그가 귀국하면 어떤 처지에 놓일지는 불문가지다.

검찰과 이민국의 손발이 맞지 않아 증인 보호조차 못하는 미국, 초강대국의 재판관할권을 침해할 만큼 자국민 보호에 철저한 이스라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칠레의 피노체트가 스페인 요청으로 영국에서 체포된 일에서 보듯 세계화의 물결은 사법분야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스라엘도 이제 세계수준에 맞춰 자국민 보호장벽을 낮추려 하고 있다.

미국도 주한미군의 보호장벽을 낮출 뜻이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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