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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수학자의 아름다운 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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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 양성에 써 달라며 자신의 재산 3억원을 기부한 명효철 고등과학원 원장이 1일 경희의료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김경빈 기자]


지난달 31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의료원의 한 병실. 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명효철(72) 고등과학원(KIAS) 원장이 한국여성수리과학회 김완순 회장과 ‘학술활동 지원과 협력에 관한 협정’을 했다.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순수이론 분야 수학·물리학 연구를 진행하는 고등과학원이 여성 과학자들의 연구활동을 전폭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명 원장은 “기초·이론과학 분야는 여성이 활약하기에 특히 열악하다”며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진 만큼 여성과학자를 길러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명 원장은 올 7월 가벼운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오래 전 예정된 일을 실행하듯 지난달 17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고등과학원 앞으로 기부약정서를 작성했다. 예금 3억원. 미국에서 30년, 한국에서 10년간 교수로 일한 그에게 서울 종암동에 있는 20평 아파트를 뺀 전 재산이었다. 기부금은 이론과학을 연구하는 후학에게 지원될 예정이다.

1일 병실에서 만난 명 원장의 표정은 밝았다. 병실을 찾은 김재완 부원장에게 보고를 받는 등 정상적인 업무를 했다. 명 원장은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폰 노이만, 이휘소 박사 등이 거쳐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가 고등과학원의 롤 모델”이라며 “세계적인 석학을 유치하고 규모를 키우는 데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플랑크의 양자물리이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순수과학의 업적이지만 인류 문명을 완전히 바꿨다”며 “한국도 응용과학에만 투자할 것이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본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명 원장은 “고등과학원을 세계적인 연구소로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집무실에서 다시 보자”며 투병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명 원장은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78년에는 40년간 수학계의 미해결 과제였던 ‘알버트 가설(수학자 알버트가 제기한 문제)’을 해결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미국 아이오와대 교수와 미국의 유명 학술지 (‘Hadronic Journal’)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96년 한국에 돌아 KAIST 교수 등을 거쳐 2007년 고등과학원 원장에 취임했다. 명 원장은 “평생 연구에만 몰두하다 보니 돈 모을 시간이 없었다”며 웃었다.

글=이종찬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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