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원로 진보 학자도 “야당은 대안 제시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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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어제 정기국회 개회식은 또 다시 파행으로 끝났다. 순국선열 및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묵념 이후 김형오 국회의장이 개회사를 하려 하자 민주당 의원들이 의장 사퇴를 요구하며 일제히 퇴장해버렸다. 대안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서로 모욕하고 망신을 줘 분풀이나 하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언제까지 이런 응석받이의 투정 같은 정치권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건지 답답하기 짝이 없다.

정기국회는 시작됐지만 의사일정도 합의하지 못했다. 민주당은 의원직 사퇴서도 돌려받지 않은 채 의사일정은 자신들의 주장대로 하자고 한다. 국회를 열자고 합의했을 때 이미 사퇴 의사가 없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사퇴서를 돌려받지 않는 것이 여당에 대한 압박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 정치권의 수준이다. 김형오 의장도 개회사에서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미국은 흑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일본은 54년 만에 정권이 바뀌고, 중국은 초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정권과 관계없이 직권상정, 물리적 저지와 몸싸움, 장외투쟁을 반복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진보 학자인 최장집 교수가 어제 야당을 겨냥해 쏟아놓은 쓴소리는 경청할 만하다. 야4당 의원들이 모인 진보개혁입법연대라는 의원 연구단체에서 초청한 강연이다. 이런 외부의 지적에 귀를 열고 변화의 계기로 삼아 주기를 당부한다.

“현재의 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계승하는 방안 만들기에 급급하다”는 최 교수의 지적은 적절했다. 시대적 소명은 바뀌고 있는데도 구시대의 찌꺼기나 차지하겠다고 경쟁을 벌이는 것은 일본 자민당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과거 정부가 잘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민주 대 반민주라는 틀로 모든 것을 재단하던 그 시각으로 현재의 문제를 풀어갈 수도, 미래사회를 바라볼 수도 없다. 최 교수가 유연한 사고를 요구한 것도 그런 잘못을 꼬집은 것이다.

이렇게 야당에 철학도 비전도 없다 보니 ‘정서적 급진주의’에 끌려 다니며 자극적인 노선을 추구하게 된다. “이명박 정부를 총력으로 공격하는 게 진보의 내용인 것처럼 오해”(최 교수)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선거에 이긴 현 정부에 불만만 쏟아낼 뿐 왜 국민이 자신들을 버렸는지 반성하지 못하니 새로운 대안이 보일 리도 없다. 최 교수는 “앞선 정부의 잘잘못을 냉정히 평가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논의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국회는 일하는 곳이 아니라 싸움터가 돼 버렸다. 나라의 미래가 아니라 다음 선거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게 유리한가만 따지고 있다. 유치한 몸싸움, 상대를 흠집 내는 것으로 정권을 맡을 순 없다. 최 교수도 “진보파가 무책임할 때가 많다”고 했다. 민주화 이후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정권을 달라고 요구하려면 최소한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보다 더 시급한 건 국민을 짜증나게 하는 낡은 행태부터 던져 버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