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제네바실수를 잊지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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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한의 핵시설 의혹을 풀기 위한 한국.미국.일본 대북 (對北) 담당자들의 실무협의가 구체화되고 있다.

미국내 주요 언론과 정책담당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미국은 북한 핵의혹시설에 대해 크게 3단계의 해법을 구상하고 있다.

1단계는 대화채널이다.

북한과 미국의 외교채널을 열어 놓고 대화와 협상으로 북한을 설득하는 방법이다.

4자회담, 북.미회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국제기구나 중재자.중재국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2단계는 북한 고립이다.

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금창리 핵의혹시설에 대한 사찰에 불응하고 대가를 요구할 경우에는 대북한 봉쇄를 위한 최소한의 조처가 시작되고 포용정책은 철회된다.

극심한 경제위기와 식량난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을 무시하는 것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초강경 처방이다.

3단계는 군사적 대결이다.

고립된 상태에서도 북한이 핵을 계속 개발하거나 미사일의 개발.판매를 멈추지 않을 경우에는 미국은 최후의 방법인 무력공격을 선택할 것이다.

미국 강경파와 일본 조야를 중심으로 거론되고 있는 한반도 위기설은 이 3단계에 초점을 맞춘 견해다.

현재까지 미국은 1단계 수준에서 북한을 대하고 있다.

이러한 시나리오에 따라 9일 서울에서 개최된 3국 협의회에선 북한이 의혹시설에 대한 정례적인 사찰 (또는 방문) 을 수락할 경우 인도적 식량지원을 분담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본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EDO) 차관공여 협정과 관련해서는 북한의 미사일위협이 해소돼야 북한의 편의를 봐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2차대전 이후 군사문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온 일본의 국내 여론이 북한 미사일에 대해서만큼은 얼마나 공포를 가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회의에서는 일단 한.미 공조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매듭을 확실히 짓기 위해 94년에 이뤄진 북.미 제네바합의를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그때의 합의는 1단계에서 사태를 마무리해 긴장을 피하는 데는 성공한 경우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북한의 핵확산을 우선 막아야 한다는 필요에 쫓겨 중요한 두가지 사항을 간과했다.

'현재' 의 핵동결에 집착한 나머지 '과거' 핵에 대한 규명을 유보했으며 미사일 개발 금지에 대한 조항을 삽입하지 않았다.

북한은 이러한 약점을 십분 활용해 두번째이자 99년도판인 금창리 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제네바 합의는 남북한과 미국의 이해관계를 모두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것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3자의 이해관계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지 않았거나, 때문에 가볍게 취급됐던 문제들로 인해 위기의 불씨가 되살아난 것이다.

이는 중요한 교훈이다.

당시 북한은 한반도 적화통일의 기조를 바꾸지 않았음에도 기존 핵에 대한 면죄부를 받았다.

KEDO 등을 통해 경제혜택을 얻고 미사일 등 무기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미국은 북한이 핵 보유국 대열에 서는 것을 반대했다.

미국은 세계 핵구도 속에서 북한이 핵을 새롭게 보유하고 개발하는 것을 방지하고 연8회 이상의 공식적인 북.미 대화채널을 개설하게 됐다.

한국은 제2의 한국전을 피하기 위해 북한과 미국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과의 영구적인 핵 불균등이 초래됐고 대북 경제지원의 70% 부담을 감수했다.

제네바합의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은 대남 관계에서 한국 정부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안기부 해체.국가보안법 철폐.주한미군 철수라는 조건을 내세우며 새로운 거래를 계획하고 있다.

정부가 북한이나 다른 나라에 더 이상 호락호락한 존재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만큼은 제네바에서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북한 핵의 위협은 그 특성상 한반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북한의 핵보유와 미사일 개발.수출은 크게 보면 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처사며 일본.중국.러시아.미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 주변국들에 이러한 점을 효과적으로 주지시키고 이들과 적극적으로 공조해야 한다.

또한 북한에 대해서도 미사일과 핵무기 등의 개발과 판매가 단기적으로 북한의 경제적 이득과 무력 협박에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점차 주변국들의 군비경쟁을 유발한다는 것을 인지시켜야 한다.

북한이 무기 판매와 기술 이전으로 세계평화를 교란시킬 경우 북한은 제2단계인 고립과 제3단계인 무력대결의 단계에 직면해 정권유지와 체제붕괴라는 위험을 안게 되며 결국 엄청난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야 한다.

김정원 세종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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