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 김은 가요에 팝송 최초 접목 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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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패티 김의 음악은 73년까지의 길옥윤 시대와 그후의 박춘석 시대로 대별된다.

그만큼 두 작곡가는 패티 김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다.

59년 데뷔한 패티김은 초반에는 주로 팝송을 불렀으며 63년 미국에 진출, 자니 카슨쇼에 8차례나 출연하고 64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플라워 신드롬' 에 중국여인 역으로 출연하는 등 '미국가수' 에 가까웠다.

국내에서는 그 기간중 '틸' '파드레' 등 팝과 박춘석 작곡의 '초우' 가 히트했지만 한국가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은 아무래도 66년 2월 귀국, 길옥윤과 콤비를 이루며 시작된다.

당시 그녀에게 연정을 느꼈던 길옥윤은 그녀가 4월께 도미한다는 말을 듣고 "4월이 가면 떠나야 할 그 사람/5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로 시작되는 '4월이 가면' 을 지어주며 열렬한 구애공세를 펴, 그해 12월 결혼에 골인한다.

이후 두사람은 '연인의 길' '사랑하는 마리아' '서울의 모정' 등 숱한 히트곡을 터뜨렸으나 73년 성격차로 이혼하고 만다.

그때 발표된 '이별' 은 현실을 옮겨담은 듯한 제목과 가사 (패티 김은 이혼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곡은 절대 아니었다고 밝혔다) 로 화제를 모으며, 3천장 팔리면 히트곡이 되던 당시 10만장이 판매되는 기록을 냈다.

74년 다시 도미한 패티 김은 76년 이탈리아인 사업가 게디니와 소리없이 재혼한 뒤 78년 귀국, 세종문화회관 개관무대로 컴백한다.

이때 박춘석과 탄탄한 콤비를 이룬 그녀는 한결 클래식하면서 대곡풍의 노래들을 발표하는데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83년)' 은 이들 콤비를 대표하는 수작. 가요에 서구 현대팝을 접목한 최초의 가수로 평가되는 패티 김은 TV를 선구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가수이기도 하다.

그녀의 풍만한 몸매, 능숙한 화술, 서구적인 제스처는 브라운관에 꼭 들어맞아 PD들에게 인기 최고였다.

그녀가 한국과 미국을 오갈 때마다 TV에서는 '고별쇼' '귀국 환영쇼' 가 한시간 넘게 방송돼곤 했다.

그녀는 또 미국은 물론 일본 진출도 1호 (60년 NHK에서 초청) 경력을 자랑한다.

일본에서 통산 앨범 4장.싱글 10장을 발표한 그녀는 '쇼 비즈니스 본고장 미국에서 익힌 실력에 동양적 감성을 조화시킨 아티스트' 로 존경받고 있다.

강찬호 기자

도움말 : 강헌 (가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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