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검찰]관행과 여론사이서 검사들 가치관 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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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지검의 중견 A검사는 이종기 (李宗基) 변호사 수임비리 사건 이후 전별금을 받은 검사들이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가치관에 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전별금을 미풍양속으로 여겨왔는데 하루 아침에 죄악시되고 평소 존경하던 선배 검사가 옷을 벗는 상황으로 변했다.

그는 "전별금이 문제된다면 전국 검사들이 모두 '공범' 이며 검사 경력에 비례해 죄상 (罪狀) 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수뇌부가 이를 문제삼는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니냐" 고 반문했다.

A검사가 몇년 전 지방근무를 끝내고 서울로 부임할 때 받은 전별금은 5백여만원. 동료 검사들이 5만원씩, 한 방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일반 직원들이 3만원씩 성의를 표시한 결과다.

친하게 지낸 변호사.기업인들도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떠나보내 미안하다" 며 20만~30만원을 '석별 (惜別)' 이라고 쓰여있는 봉투에 담아 내밀었다.

그는 전별금의 일부를 이사비용으로, 나머지는 용돈으로 사용했다.

그는 "전별금은 어느 조직에나 있다. 떠나는 사람에게 정성을 표시하는 것은 순수한 마음의 발로며 이것을 막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 항변한다.

현직 검사장 B씨도 A검사의 주장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차장검사 재직 때 정기 인사철에 후배 검사나 직원들에게 건넨 전별금 총액은 3백만원선.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부담이 됐지만 먼길을 떠나는 후배들을 격려한다는 의미에서 흐뭇한 마음으로 봉투를 만들어 주고는 했다.

이처럼 전별금에 대해 현직 검사들 대부분이 순수성을 강조한다.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 (全京秀) 교수는 "전별금은 호혜성 (互惠性) 원칙 아래 주고 받는 것으로 일종의 '부조' 성격을 갖고 있으며 구성원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주는 순기능을 갖고 있다" 고 말한다.

그러나 거액의 뇌물이 전별금이란 이름으로 포장돼 전달되기도 한다.

지방 차장검사를 지낸 C씨는 1천만원이 든 '미의 (微意)' 를 전달받고 당황해 황급히 되돌려준 씁쓸한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윤리기준과 관행의 틈바구니에서 검사들이 아직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기는 향응과 '떡값' 부분도 마찬가지. 회사원 D씨 (39) 는 2개월 전 친구인 E검사가 술 한잔 사겠다는 말을 듣고 서울 강남의 단란주점에 나갔다 중소기업인을 소개받고 인사를 나눴다.

자리가 끝난 뒤 술값 계산은 당연히 기업인의 몫. 이 기업인은 "검사들의 술자리에 가끔 초대받는다. 그러나 말이 초대지 사실은 술값을 내라는 요구나 다름없다" 고 말한다.

그러나 기업인들이 '스폰서' 역할을 강제로 떠맡기보다 자청하고 나서는 경우가 더 많다.

나중에 사건 청탁을 할 경우 '보험' 역할을 톡톡히 하는 데다 밖에 나가 '내가 검사를 잘 안다' 고 당당하게 위세를 떨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향응.떡값을 문제삼는 데 대해 검사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F검사는 자신이 만약 대전에 근무했더라면 이번에 옷을 벗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지방근무 시절 검사와 유지들의 회식 자리를 마련하는데 검찰측 메신저 역할을 한 것 때문에 법조비리 사건이 터진 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단순히 밥 같이 먹고 술 한잔 먹는 것이 뭐가 잘못됐느냐. 검사치고 향응 한번 받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 며 "이 기회에 향응의 기준을 명확히 마련해야 한다" 고 말했다.

친지 등의 부탁으로 변호사를 소개해 주는 것에 대해서도 검사들이 혼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최근 누나가 변호사 선임을 부탁해 오자 "동생 옷벗길 일 있느냐" 며 한마디로 거절, 남매 사이가 서먹해졌다.

한 소장 검사는 "명예훼손에 따른 민사소송을 준비 중인 친구에게 사법연수원 동기생인 변호사를 소개해 주고 '내 이름을 사건기록부에 적지 말라' 고 부탁했다" 며 씁쓰레해 했다.

그러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전별금.향응 접대 등이 과거의 관행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이상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석연 (李石淵) 변호사는 "법조 정화를 위해서는 검사들이 지금까지의 특권의식에서 벗어나 몸을 낮출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김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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