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이 달라졌다]6.투명 경영·격식 파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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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해말 한 중견그룹 오너가 회사 공금으로 해외유학중인 자녀에게 돈을 보내려다 전문경영인으로부터 거절당한 일은 한동안 업계의 화제가 됐다. 그런가 하면 보워터한라제지 임원들은 지난해 가을 '전례대로' 거래처에 추석선물을 보내는 일을 놓고 미국인 임원을 설득하느라 한참 고생했다고 한다.

외국인의 경영 참여가 확산되면서 기업 경영에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외국계 기업으로 거듭난 국내 회사들의 가장 큰 변화는 결재과정 축소와 수평적 인간관계 형성과 같은 과감한 '격식파괴'.

P&G쌍용제지의 경우 직원들이 사장실로 보고서를 들고 바로 들어간다. 보고서도 산뜻하게 꾸며진 기안양식이 아니라 그냥 컴퓨터에서 뽑은 A4용지. 과장 - 부장 - 임원으로 이어지는 결재란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김씨는 "내용이 문제지 형식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며 "예전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 이라고 말했다.

OB맥주에서는 사장이 사무실에 수시로 들러 용건을 말하는데 사장은 서서, 직원들은 제자리에 앉아서 대화하는 일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는 것. 삼성중공업 중장비부문이 분리독립한 볼보건설기계코리아의 앤서니 헬셤 사장은 여비서가 자리를 비우면 자신이 직접 복사하고 PC앞에 앉아 문서기안도 한다.

5~10개나 됐던 기안서류 결재란을 두세개로 줄인 것도 그의 지시사항. 대신 업무 강도는 훨씬 빡빡해 졌다.

OB맥주 이재섭 과장은 "전과는 달리 야근이 잦으면 되려 무능하다고 보는 분위기라 점심시간을 쪼개가며 업무를 보충한다" 고 전했다. 주류회사 특유의 거나한 낮술 한잔은 옛날 얘기고, 업무시간 중 잡담도 사라졌다.

영어는 기본. OB맥주 토니 데스엣사장은 얼마전 '사원과의 대화' 시간에 "영어 잘하는 직원과 업무능력 뛰어난 직원중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는 질문에 "영어는 기본이라 선택 요건이 될 수 없다" 고 잘라 말했다.

지난해 10월 벨기에인 데스엣사장 취임후 불과 몇달만에 인삿말이나 농담을 영어로 주고 받는게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됐다. 대신 최근 이 회사 직원간에 'Survival' (생존) 이란 단어가 가장 빈번히 회자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 졌다는 뜻이다. 이런 외형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내적인 변화. '글로벌 스탠다드' 에 입각한 투명경영 관행이 서서히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초 영국 투자회사에 인수된 대유리젠트증권은 국내업계 처음으로 반기 (半期) 배당제도를 도입, 영업손실을 그때그때 회계장부에 포함시키고 있다. 외자유치 기업중 상당수가 1년에 네번 영업실적을 결산키로 한 것도 같은 맥락.

접대.기밀비 관행이나 회계 방식에도 일대 변화를 몰고 왔다. 지난해 10월 독일기업에 인수된 FAG한화베어링의 경우 간부들은 법인카드를 모두 반납해야 했다.

함훈부장은 "설비수선 대금을 비용이 아닌 투자 항목으로 돌려 이익을 부풀리는 식의 예전의 편법 회계관행이 사라졌다" 고 말했다. 한 주류회사의 임원은 "절세 (節稅) 나 거래처 유지 차원에서 인사가 필요하다" 고 경영진에게 직언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강인수 숙명여대 교수는 "원칙을 중시하는 외국계 기업의 경영풍토가 국내 비즈니스와 경영 풍토를 전반적으로 건전하게 만드는 순기능이 크며 이는 불가피한 대세" 라고 말했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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