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내각제 권력게임,87~99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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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내각제는 집권세력내 제1인자와 2인자간의 권력게임이다.

지난 87년과 92년에 바로 그런 드라마가 펼쳐졌다.

87년 전두환 (全斗煥) 정권은 내각제를 내세워 국면전환을 시도했다.

김대중 (金大中).김영삼 (金泳三) 씨가 주도하는 야당과 재야는 내각제 개헌이 군사정권의 집권연장 음모라며 저항했다.

그러자 집권세력은 기존의 간선제로 후퇴하는 무리수를 뒀다.

이른바 4.13 호헌선언이다.

이는 6.10항쟁을 불러일으켰고, 6.29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마무리됐다.

내각제 퇴장은 무엇보다 국민의 직선제 열망과 두金씨의 단합이 이룩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권력 내부에도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내각제엔 全대통령이 퇴임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반면 2인자인 노태우 (盧泰愚) 민정당대표는 7년 간선제 대통령을 원했다.

全대통령은 간선제라는 편안한 권력코스를 넘겨주지 않으면 "의리가 없다" 는 말을 들을까봐 고민했다.

권력의 생리에 순진했던 탓일까. 그런 갈등 때문에 내각제를 밀어붙이는 권력층의 돌파력은 그리 거세지 못했다.

2인자의 위상이 커지면서 1인자의 정국구도가 밀려버린 것이다.

90~92년 민자당의 내각제 드라마에선 1인자와 2인자의 권력게임이 더욱 실감나게 드러난다.

3당 합당때 盧대통령과 김영삼.김종필 (金鍾泌) 씨는 내각제 개헌추진 각서에 서명했다.

개헌 시점은 '합의후 1년내' 였다.

YS에겐 권력을 나누는 내각제가 성에 차지 않았다.

권력을 독점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합의를 기술적으로 파기해 나갔다.

국민이 원치 않고, 야당이 반대한다는 명분을 선점하면서 盧대통령을 압박했다.

청와대 단독대좌때 YS는 盧대통령의 퇴임후 안전 보장과 자신의 탈당이란 회유.협박카드를 번갈아 쓰면서 상황을 장악했다.

그러면서 "개헌 대신 헌법 속의 내각제적 요소를 활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 고 설득했다.

내각제 요소의 활용이라는, 당시로선 기발한 아이디어는 이인제 (李仁濟) 의원이 냈다.

2인자의 집념 앞에서 盧대통령의 구상은 서서히 무너졌다.

내각제를 놓고 여론의 무수한 찬반토론이 있었지만, 내각제 게임은 결국 1인자와 2인자 중 누구의 권력의지가 치열한가에 의해 결판났다.

99년의 내각제 드라마는 어떻게 펼쳐질까. 金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간의 개헌합의는 지켜질 것인가, 깨질 것인가.

92년과 다른 점은 1인자가 확고한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 극복을 위한 권력관리 의지도 단단하다.

반면 이들의 합의는 6공때처럼 밀실에서 이뤄진 게 아니고 국민에게 공개한 약속이다.

내각제 게임은 벌써 예비전이 시작됐다.

청와대.국민회의는 IMF로 인한 상황변경론과 경제우선론을 내세워 개헌일정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맞서 자민련은 "공동정권의 기반은 신의" 라는 金총리의 발언을 앞세워 '거짓말 논쟁' 도 불사할 태세다.

그러나 2인자 쪽의 내부결속은 92년 때보다 약하다.

자민련의 많은 사람들은 권력의 맛을 보고 있다.

연합정권에서 이탈하는 선택은 그들에게 '모험' 으로 비친다.

경제부터 먼저 살리자는 1인자측의 명분도 무시하기 어려운 장애물이다.

1인자 진영도 내각제를 덮어버리기가 쉽지 않다.

金대통령은 "내가 먼저 신의를 저버린 일이 없다" 는 다짐의 말까지 하지 않았는가.

내년 4월 총선때 약속파기가 쟁점이 될 수 있다.

그런 속에서 내각제 논쟁은 정국불안의 추가요소로 자리잡았다.

여야간 가파른 대치, 경제청문회를 둘러싼 과거정권과 현정권간의 대립에다 여권내 갈등이 겹쳐 정국의 흐름이 어지럽다.

지금의 정국혼선은 여야 현장 지도부의 리더십 부족, 의원의 자질문제 등에도 기인하지만 집권세력의 정국관리 구상이 불확실한 점 또한 큰 요인이다.

1인자와 2인자의 권력게임적 요소가 강할수록 정국의 불안정성.휘발성은 높아진다.

이는 정치상황에 민감한 경제에 나쁜 영향을 준다.

92년의 경험이 이를 말해준다.

金대통령과 金총리는 내각제 문제의 불확실성을 빨리 걷어내야 한다.

경제회복을 위한 리더십의 집중과 정치적 신의 등 서로의 주장을 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

개헌의 연기든, 내각제의 변형이든, 아니면 합의대로 추진하든 정국 스케줄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그것이 튼튼한 국정관리의 출발이다.

박보균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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