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러시아]물물교환 성행 중세시대 닮은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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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모스크바 = 김석환 특파원]러시아 중부 스몰렌스크시의 통조림 공장 '스몰 미야소' 사장인 바딤 스코르바슈체프는 요즘 한달중 20일은 출장을 다닌다.

그가 혹한속에 러시아 각지 공장들을 쏘다니는 이유는 자재조달이나 제품납품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된 육류 통조림과 교환할 물건을 찾는 것이 주목적이다.

'스몰렌스크' 와 '미야소 (고기)' 를 합친 이름인 이 회사의 통조림은 다행히 매우 인기가 높다.

자주 방문하는 곳은 보드카공장 또는 알루미늄 공장. '상담' 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통조림과 이들 제품을 맞바꾼 뒤 시장에 내다 팔아 자금을 마련하거나 공장종업원들에게 임금 대신 지급한다.

그의 부지런함과 통조림의 인기 덕분에 다행히 임금이 밀린 적은 아직 한번도 없다.

스코르바슈체프는 지난달엔 밀린 세금을 역시 고기통조림으로 지불했고 전기회사에는 확보해둔 보드카를 전기요금 대신 납부했다.

통조림을 만드는데 필요한 알루미늄 자재, 고기를 공급받기 위한 사료 등도 모두 통조림과 교환해 벌어들인 보드카.기름.텔레비전 등을 처분해 마련하고 있다.

그에게 통조림은 나날이 가치가 떨어지는 루블화보다 더 확실한 '현찰' 에 해당한다.

빈사상태에 접어든 지 오래된 러시아 경제에 그나마 피가 돌고 호흡이 이어지는건 '보드카 경제' 덕분이다.

물물교환으로 버티는 바터 (barter) 경제에서 보드카는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다.

화폐경제가 그래도 유지되고 있는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에서도 보드카는 현찰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3백루블 (약 15달러) 짜리 고급 보드카 (1ℓ)가 손에 들어오면 레스토랑이나 동네 가게로 가져가 85~90% 가격으로 현금.물품과 바꿀 수 있다.

모스크바 시내 화장품 공장에서 일하는 로자 안드레예브나 (52.여) 는 지난달말 4개월치나 밀렸던 월급을 석달치는 향수로, 한달치는 루블화로 지급받았다.

마침 향수는 연말연시 선물용으로 인기있던 참이라 화장품 가게에 70% 가격으로 되팔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율라 블라소바 (37.여) 는 어느 해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월급으로 받은 크리스털 유리잔 세트가 영 팔리지 않아 그냥 집에 쌓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물교환 경제는 대도시보다 시골지역에서 특히 성행하고 있다.

바터경제는 서민층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지난해 11월 펜자주 (州) 와 한티 - 마이스키주, 그리고 모스크바시는 펜자주가 모스크바시에 대해 갖고 있는 채권을 한티 - 마이스키주에 넘기고 한티 - 마이스키주는 펜자주에 농산물을 공급하며 모스크바시는 한티 - 마이스키주에 대해 갖고 있던 채권을 펜자주에 대한 채무와 상계한다는 내용의 3각 바터를 성사시켰다.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채권.채무관계에 얽매여 있느니 차라리 바터를 통해 필요한 물품도 확보하고 경제를 돌리자는데 주지사.시장들이 합의한 것이다.

각계각층서 다양하게 이뤄지는 바터거래는 어떤 경우에는 10여개 이상의 물품이 복잡하게 꼬리를 물고 이뤄지기도 한다.

러시아 경제부에 따르면 현재 전력요금 등 공공요금은 20% 정도만 화폐로 납부되고 80%는 이같은 바터로 처리된다.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총리의 경제자문인 드미트리 르보프 박사는 "현재 러시아 경제의 약 70% 정도가 현금거래 없이 물품.서비스의 바터를 통해 돌아가고 있다" 며 "공산주의 몰락후 러시아는 시장경제체제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중세시대의 물물교환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고 씁쓸하게 말했다.

17일 모스크바 시내에서 만난 택시기사 세르게이 마트비엔코 (51) 도 신랄하다.

"브레즈네프 시대 (70년대)가 좋았다. 그 때는 어느 공장이든 매월 10일이면 임금이 꼬박꼬박 나왔다. 그런 시절은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세르게이는 러시아경제의 현재의 몰락상이 브레즈네프 시대에 본격적으로 배태 (胚胎) 되었다는데 많은 학자들이 공감한다는 점은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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