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재정확대·감세만으론 해결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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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금 여야 간에 경제회생 방안을 놓고 모처럼 건전한 정책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여당은 재정지출 증가를 통한 경기부양을 제안하고 있고, 야당은 세금 감면을 통한 경기부양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정치권이 경제회생을 위한 처방찾기에 나선 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경제회복 방안들은 한국 경제가 앓고 있는 병의 증상을 볼 때 근본적 처방은 아니다. 지금 한국병은 분기별 성장률의 등락에 일희일비하면서 재정조세 정책수단을 가지고 총수요 관리나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한국 경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문제는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성장잠재력의 약화다. 이것은 단기적인 경기부양 정책이나 총수요확대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것은 마치 운동선수가 체력단련은 안하고 개인기만 연습하는 것과 같다.

지금 한국 경제가 필요한 것은 경제체질의 강화와 공급능력의 확대다. 공급능력이 감소하고 있는데 총수요만 늘린다 해서 고용과 소득이 늘어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의 공급능력은 어떻게 늘릴 수 있나.

공급능력은 생산설비가 늘고 기술이 향상되면 늘어난다. 이를 위해서는 설비투자와 기술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경제에서 지금 기업의 기술투자와 설비투자는 수년째 제 자리 걸음이다. 그래서 한국 경제의 공급능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또 공급능력을 늘리려면 모든 분야에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생산성을 높이려면 모든 경제주체들이 열심히 일하고 생산요소의 낭비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실업률은 줄어들지 않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마저 해외로 계속 유출되고 있다. 여기에 빠른 노령화와 은퇴 인구의 증가, 주40시간 근무제는 한국 경제의 공급능력에 부담이 되는 일이다. 일자리와 일할 사람이 줄고, 그나마 일하는 사람들조차 일을 적게 하려 한다면 당연히 경제의 생산능력은 저하된다.

생산요소의 낭비를 줄이고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면 토지.노동.자본 등이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배분되어야 한다. 그런 기능은 관료보다 시장이 훨씬 더 잘한다. 요소시장이 시장원리에 따라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제도와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

지금 한국의 노동시장에선 구인난과 구직난이 공존하고 있고, 토지시장에선 노는 땅은 많지만 정작 기업은 공장 지을 땅이 없다고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또 자금시장에선 돈을 쌓아놓고도 투자하지 않는 기업과, 핵심기술이 있어도 자금이 없어 도산하는 기업이 공존하고 있다. 한국의 생산요소 시장은 낭비와 비효율, 경직성의 덩어리다.

이것은 한국 경제가 가지고 있는 생산요소조차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고 그만큼 우리 경제의 생산성과 경쟁력은 떨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정부가 한국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고 생산능력을 높이려면 생산요소 시장에 대한 규제를 과감하게 개혁하고, 기업이 기술과 설비에 투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강력한 투자유인을 제공해야 한다. 투자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치 사회적 안정이 필요하고, 제발 먹고 사는 문제와 무관한 공리공론적 개혁.이념 갈등형 개혁은 자제되어야 한다.

기업이 투자 안 하는 것을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보는 수준의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여당에 있기 때문에 바로 기업인이 투자를 꺼리는 것이다.

모처럼 조성된 정치권의 생산적 토론 분위기가 자칫 정부여당 내 소위 개혁론자들의 이념공세에 의해 무산될까 우려된다. 국민이 원하는 진정한 개혁은 국민을 잘 살게 해주고 주변국들이 우리를 업신여긴 나머지 우리 역사마저 도둑질해 가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신장시키는 것이다. 여당 내 소위 개혁론자들이 주장하는 우리의 미래 비전이 과연 무엇인지 이번 기회에 국민 앞에 드러나게 된다면 오히려 다행이겠다.

김종석 홍익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