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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화유산답사기]21.조선미술박물관의 겸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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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얼마 전에 열린 한 문화재 관계 세미나장에서 제자뻘 되는 후배가 정감의 표시로 가볍게 던진 인사말이 내게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선생님은 역시 겸재 (謙齋) 를 별로 높이 보지 않으신게죠?" "왜?"

"단원 그림에는 그렇게 애정을 보이면서 겸재는 건너뛰어 뒤로 미뤄놓았으니까요. " 그는 이어서 내가 '역사비평' 에 '조선시대 화가의 삶과 예술' 을 연재하면서 벌써 8명의 화가를 얘기하도록 겸재는 아직 거론도 안했음을 말했다.

듣고 보니 그렇게 비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내가 겸재를 낮게 평가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겸재를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한다.

지금은 몹시 후회하고 있는 일이지만 몇해 전 후배뻘 되는 한 동료 미술사가가 겸재를 폄하하는 듯한, 있을 수 있는 질문을 던진 것에 그만 얼굴까지 붉히며 화를 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든 일도 있다.

또 개인적으로는 20여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때 겸재의 '옹천 (甕遷)' 이라는 그림을 보다가 그 자리에서 만난 한 여학생이 지금 나의 안사람이 됐으니 나로서는 더욱 잊을 수 없는 인연의 화가다.

겸재 정선 (鄭.1676~1759) 은 조선후기 민족적 사실주의 화풍의 선구로서 한국의 산수화, 이른바 진경산수 (眞景山水) 의 창시자이자 완성자다.

겸재의 예술이 지닌 민족사적 의의는 누구보다 그의 벗이기도 한 관아재 조영석이 그의 금강산화첩에 부친 다음과 같은 평에 잘 나타나 있다.

"겸재는 조선 3백년 역사 속에 보기 드문 화가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은 산의 다양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화본 (畵本)에 얽매여 그리므로 매양 똑같았다.그러나 겸재는 금강산과 영남의 명승을 두루 답사하며 새로운 화법으로 이를 담아내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바로 겸재로부터 새롭게 출발했다고 할 것이다. "

그런 겸재를 왜 낮게 생각했겠는가! 그동안 내가 겸재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못한 것은 사실 금강산 때문이었다.

겸재의 진경산수는 금강산 그림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712년 (36세) 과 1747년 (71세)에 두차례 금강산을 다녀왔을 뿐이지만 평생 그린 그림의 반이 금강산일 정도로 많다.

그의 금강산 그림을 보면 소재의 사실성에 충실해 '만폭동' '정양사' '금강대' 등 어디를 그리든 실경을 박진감 있게 그리려는 뜻이 역력히 보인다.

그 점에서 겸재는 탁월한 리얼리스트였다, 그러나 동시대 문인들은 겸재의 묘처 (妙處) 는 사실성이 아니라 대상의 정신을 표현한 데 있음을 곧잘 강조하곤 했다.

한 예로 그의 절친한 벗이자 예술적 지지자였던 이하곤 (李夏坤) 조차 겸재의 미덕은 사생 (寫生)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운 (神韻) 을 나타냄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관념이 더 우세했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보다 금강산을 직접 보고서 어떻게 생긴 실경을 겸재는 그렇게 그렸는가를 따져볼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니 비록 속으로 짐작되는 바가 있기는 해도 금강산을 보지 못했으면 좀처럼 내놓고 말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금강산을 두차례 다녀왔고 이제는 그 스스로의 물음에 답할 준비도 돼 있다.

그 결론만 여기서 줄여 말한다면 겸재의 진경산수는 사실에서 출발해 사실성을 목표로 하는 이형사형 (以形寫形) 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해 정신에로 나아가는 이형사신 (以形寫神) 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하곤이 강조한 신운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겸재는 개별적인 것에서 출발해 보편적인 것에 이른 대가였던 것이다.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는 겸재의 그런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그림이 4점 소장돼 있었다.

'단양 사인암' '너럭바위' '봄비' '옹천의 파도' .4점 모두 겸재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남한의 미술사학계에도 익히 알려진 야무진 작품들이다.다만 단원의 '자화상' 에 비할 때 신선도가 떨어져 얘기를 뒤로 돌렸을 뿐이다.

'단양 사인암' 은 사인암의 벼랑과 냇물을 목맛과 붓맛으로 극명하게 대비시킨 전형적인 진경산수이고, '너럭바위' 는 굳이 어디를 그렸는지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산기슭 어느 한쪽 평평한 바위 아래로 에돌아가는 계곡을 눈맛도 시원하고 호방한 붓놀림으로 잡아낸 사랑스런 작품이다.

그리고 그의 72세 때 노년작인 '봄비' 는 언뜻 보면 문인화풍이라 하겠지만 길가의 버드나무나 안개 속의 시골마을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역시 나그네의 시정을 담은 우리 산천의 보편적 풍광으로 보인다.

그중 겸재 예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옹천의 파도' 다.

고성군과 통천군 경계선상에는 옹천.속청 독벼루라는 높은 벼랑이 있다.

마치 큰 독이 물에 거꾸로 박혀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고성과 통천을 오가려면 험한 산발을 몇십리 돌아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벼랑에 두어자 되는 길을 내었는데 두 사람이 간신히 어기어 지날 수 있다.

이런 줄도 모르고 고려말에 왜구들이 여기를 쳐들어 왔을 때 고성.통천 사람들이 '본때 있게' 섬멸시킨 뒤로는 옹천은 '왜륜천' 이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겸재는 통천에서 총석정을 보고 고성의 해금강으로 가는 길에 이 옹천을 지났다.

36세 때 그린 그의 '옹천' 은 고성에서 통천쪽을 바라보며 그린 매우 사랑스런 그림인데 반해, 아마도 70대에 그렸을 이 '옹천의 파도' 는 옹천 벼랑의 양감 (量感) 과 바위의 질감 (質感) 을 강한 붓질로 한껏 강조하고서는 굽이치는 동해의 파도를 화면 위쪽까지 덮어버림으로써 장쾌한 기상을 담아낸 것이다.

북한의 미술사가들도 이 점에 주목하며 '옹천의 파도' 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겸재의 이런 사실주의적.민족주의적 미덕에 만족하지 못하고 '애국적 관점' 에서 강조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1992년에 펴낸 '금강산 일화집' 에서는 겸재가 이 고장 한 어부로부터 백성들의 영웅적인 싸움 이야기를 듣고서 '옹천의 파도' 를 비로소 감동스럽게 그렸다는 새로운 일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조선전사' 제11권 3백65쪽에서는 이 그림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글머리에 덧붙여 놓았다.

"우리 인민이 일찍이 강원도에 쳐들어 왔던 왜놈들을 바닷속에 깊이 처넣은 옹천을 묘사한 그림…. " 북한 학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심정과 사연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전설의 시대가 아니라 사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 자체를 말하면서 겸재의 뜨거운 애국심을 상기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설득력을 갖는 것이 아닐까. 나라면 차라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겸재의 진경산수에는 이처럼 조국 강산에 대한 사랑과 자랑이 언제나 넘쳐 흐르고 있다. "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회는 "북한의 현대미술" 편입니다.

◇ 정정 = 지난회 (98년 12월 26일자) 본문중 1천원권 지폐의 퇴계 얼굴그림을 그린 화가는 장우성 화백이 아니라 이유태 (李惟台) 화백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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