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529호' 소모전 끝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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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회 529호실을 가운데 두고 여야가 선전전을 벌이는 가운데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연말연시라면 어느 누구라도 근신하는 가운데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 덕담을 나누는 것이 상식인데 우리 정치권은 유별나게 상식이 없다.

세모를 반납하면서까지 극한 투쟁을 선택한 야당이나 서슬 시퍼렇게 밀어붙

이는 집권당을 보며 우리는 다시 한번 좌절한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1년 가까이 됐지만 정치는 늘 그 타령이었다.

총풍.세풍.체포동의안 등의 언설 (言說) 이 대변하듯 한시도 바람잘 날 없었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나날이었다.

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에 의한 문민정부가 닻을 내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고 변론할 수 있다.

집권당이지만 소수파니 무리하게 힘을 쓰다보면 잡음이 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 정도로 양성 (陽性) 진단을 내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 우리는 꿈을 가질 수 있었다.

민주정치의 발목을 죄고 있던 권위주의체제가 완전히 물러나게 되니 인권이 존중되고 민생이 돌보아지며 법이 지켜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기대는 여전히 기대로 남아 있다.

현재의 정치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법치 (法治)가 아닌 인치 (人治) 의 문제며 권력집중현상이 완화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오래 전에 그레고리 헨더슨이라는 학자가 한국 정치의 특징을 회오리바람 정치 (politics of vortex)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누가 권력을 잡든지 그 권력의 핵심으로 모든 것이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꼭 회오리바람과 같다는 것이다.

그 학자가 당시 정치상황만을 가지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당시는 권위주의시대였고, 그래서 우리는 반론할 수 있었다.

그런 정치는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니며 권위주의 청산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국민의 정부는 바로 그 권위주의의 망령이 사라진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 있고 무엇이 가능한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물론 인치의 전통과 권력집중의 전통이 국민의 정부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발독재체제에 평생 희생당한 대통령이 경제와 정치는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하며 정치개혁을 서두를 때 우리 모두 환호했던 것을 상기해 보라. 국민의 정부에 거는 기대가 결코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이 시점에 있어 집권당으로서 해야 할 일은 민주주의의 제도화다.

정치개혁의 핵심은 바로 민주주의 제도화가 돼야 한다.

이는 전문적인 용어지만 그 요체는 다음과 같다.

권력을 잡은 자나 잃은 자나 같은 법에 의해 경쟁하는 것이다.

권력이 곧 법이 되는 상황, 더욱이 권력자가 법이 되는 상황은 민주주의 제도화와는 거리가 멀다.

제도화를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힘없는 사람이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자기 중심적이다.

남의 억울한 사정에는 어두울 뿐 아니라 자기가 억울했던 순간도 상황이 바뀌면 잊기 쉽다.

호되게 시집살이한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더 시킨다는 옛말도 있듯이 말이다.

이와 같은 제도화의 요구가 집권자에게 더 부담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집권자가 가지는 프리미엄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가 역사에 기록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투쟁에서의 승리나 권력재창출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집권경쟁에서의 승리가 권력장치를 독점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민심을 얻음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정도 (正道) 다.

국민의 정부가 공동정부인 만큼 마음이 급할 수도 있으나, 급할수록 천천히 할 일이다.

소수파로 시작했지만 순리대로 새로운 다수파의 형성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야당도 할 일이 많다.

야당이 존폐의 기로에 서 있는 것 아니냐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권위주의의 암울한 터널은 빠져 나왔다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까지 공격 한번 제대로 못한 셈이다.

내홍 (內訌) 도 있지만 체질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소모전적인 전략적 정치투쟁은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지금은 민생을 돌볼 때다.

경제.교육.남북문제.환경 등 수북이 쌓인 쟁점을 활용하는 체질로 바꿔가야 한다.

소수파가 다수파가 되는 길은 역시 야당에도 열려 있다.

새해에는 여야가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

趙重斌 국민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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