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淸朝와 무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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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의 하나인 北京의 자금성은 明朝의 영락황제가 건축한 것이다. 明이 망하고 여진족 누루하치가 세운 淸朝가 17세기 北京을 점령, 자금성을 청조의 궁궐로 그대로 이용하였다. 일부에서는 지금의 동북지방에 유목 민족이었던 만주족에게는 이렇다 할 종교나 문화가 없었고 明의 우수한 문화를 파괴하거나 재 건축할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의 협조를 얻어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선주민 문화에 대한 존경과 융화의 노력의 결과라고 보여진다.
만주족이 자금성에 들어 와 손을 본 것은 한문 현판 옆에 만주문자를 병기하여 한자를 모르는 황족들이 건물의 이름 알도록 한 정도였다. 그리고 자금성의 일부 건물에 만주식 온돌을 놓아 北京의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였다.
수많은 힌두왕들이 지배하는 북부인도는 다신교적 우상숭배로 곳곳에 인간이며 동물 숭배의 조각상이 많다. 이러한 인도에 12 세기 유일 신 알라를 믿어 우상숭배를 철저히 부정하는 이슬람세력이 지배자로 들어 왔다. 처음에 그들은 우상숭배의 조각을 가차없이 파괴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성당(모스크)을 지었다. 모스크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미나렛(첨탑)을 세웠다.
그러나 인도의 이슬람 통치자는 현지인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현지의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소수의 지배민족이 대다수의 현지 힌두족을 지혜롭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두 문화의 융합이 필요한 것이다.
모스크나 城을 지을 때도 이슬람의 문화만 고집하지 않고 그 속에 힌두교, 불교가, 기독교의 문화를 혼용하여 짓는다. 무갈제국을 가장 번성시킨 중국 淸제국의 건륭황제에 비견되는 아크발 대제는 자신의 부인을 각 각의 종교에서 선발하였다. 이슬람 왕비뿐 아니라 힌두 왕비 그리고 기독교 왕비까지도 맞이 하였다. 민족과 종교의 융화를 통해 인도를 통치한 것이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淸제국과 인도의 무갈제국이 소수민족으로 거대한 현지민족을 250여년씩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것도 민족 융화의 통치 철학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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