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할아버지께 올리는 글월'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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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저 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

한학도 높으셨고 당진 고을이 내세우는 유림이셨던 할아버지는

큰 손자인 저를 꾸짖으실 때 하시는 말씀이셨지만

저는 속으로 그 말씀이 어찌나 기뻤던지요

일제 때는 나라를 되찾아보겠다고

해방이 되고서는 좋은 세상 만들어보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며 처자식을 돌볼 줄 모르던

할아버지의 큰 아들인 저의 애비가

어린 나에게도 몹시 자랑스러웠으니까요

제가 애비를 닮았다고요?

- 이근배 (李根培.59) '할아버지께 올리는 글월' 중

워낙 성숙한 문체라 산문도 시와 비길 때가 있다.

이근배의 이 산문적인 서술시에는 고스란히 가족사 3대가 구성된다.

한 사람이 태어나 어느 만큼 살아가노라면 그가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것이 효행 따위보다 훨씬 아버지에의 혈친모방이 된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선사 (先史) 다.

이것을 거문고 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시인의 육성은 소프라노 쪽인데.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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