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탐방] 천안 극동 늘푸른아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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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참여하는 문화행사 개최
경제개념 배우는 벼룩시장도…가격 흥정 속에 정 깊어져

30도를 훌쩍 넘는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도 아파트 주민들의 영화사랑은 지치지 않았다. 천안 두정동 극동 늘푸른 아파트 얘기다. 14일 아파트 단지 안에서 열린 ‘늘푸른 가족 영화제’에는 500여 명이 참석해 뜨거운 열기를 반영했다. 여름방학 기간에 열려 아이들도 많이 참여했다. 해가 저물자 저녁을 마친 가족들이 삼삼오오 110동 뒤 농구장으로 나왔다. 가족 영화제의 마지막 행사인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나들이나 극장에 가는 것처럼 간식도 챙겼다. 영화를 보며 먹을 과자와 음료 등을 손에 든 아이들은 기분이 들떠있었다. 자리에 앉기 전 이웃들과 인사도 나눴다. 극장에서 인기가 많았던 흥행작을 보며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화를 보기 위해 나온 주민들은 상영시간 내내 무더위를 잊고 여름 밤을 보냈다.

올해 처음 열린 영화제는 이 아파트 위진아(45) 부녀회장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유익한 문화 행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시민단체인 천안KYC의 도움을 받아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됐고 다행히도 주민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영화제 전 낮에는 벼룩시장이 열렸고 아이들에게 페이스페인팅을 해주고 요술풍선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극동아파트 이경옥(42·여) 관리소장은 “끝날 때까지 주민 모두가 자리를 지켰고 주민이 함께 영화를 상영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말했다.

벼룩시장에서 아이들이 좌판을 펼쳐놓고 물건을 팔고 있다. 왼쪽 사진은 신기한 표정으로 요술풍선을 보는 아이들. 조영회 기자

◆벼룩시장으로 경제관념 배워=“고모할머니가 직접 짠 아크릴 수세미 6개를 모두 팔았어요”라고 말하며 해맑게 웃어 보인 전혜린(10·오성초 3)양. 벼룩시장에서 전양의 수입은 짭짤했다. 한 개에 1000원씩 하는 수세미를 6개 팔아 6000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 동안 아끼며 쓰지 않고 모았던 학용품도 모두 팔렸다. 가격표를 붙이기 전엔 가격을 엄마와 상의해 결정했다. 전양의 엄마 김영희(39)씨는 “경제관념을 직접 경험하며 느끼게 해주려고 나왔는데 혜린이가 물건을 판매하는 걸 즐거워했다”고 뿌듯해 했다.

가격을 정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는 장유진(11·오성초 4)양도 여러 가지 물건을 갖고 나왔다. 책과 컵·학용품·신발 등 다양했다. 손님이 물건을 보면 가격과 제품의 특징을 자세히 설명했다. 가격 흥정도 수준급이었다. 가장 아끼던 예쁜 컵이 팔릴 때는 아쉬움도 컸다. 장양은 “장사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며 “벼룩시장을 통해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거슬러 주는 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벼룩시장엔 아이들 말고도 주부들도 나왔다. 8개월 된 아이 엄마인 이은지(27)씨는 옷과 가방을 판매하기 위해 좌판을 벌였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했을 때 팔았던 옷과 사놓고 몇 번 입지 않은 옷을 판매했다. 대부분의 옷이 새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씨는 “옷을 펼쳐놓자 마자 대부분 팔려 나갔다”며 “장사가 잘 돼 너무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씨가 판매하는 가방이 마음에 들었던 한 여고생은 몇 번씩이나 오가며 가격흥정을 하기도 했다.

아파트 주민 박미정(41·여)씨는 벼룩시장에서 책 몇 권과 캐릭터가 그려진 작은 공을 100원 주고 구입했다. 박씨는 “철이 지나거나 유행이 지나면 버리는 게 많은데 이렇게 새것과 다름없는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어 좋다”며 “돈의 가치보다 기쁨이 크다”고 말했다.

◆떡볶이 한 컵에 100원=아이들의 한 손에는 종이컵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고추장이 듬뿍 묻은 떡볶이가 담긴 종이컵이었다. 아이들은 종이컵에 속의 빨간 떡볶이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이 아닌 떡볶이를 먹어 송골송골 콧등에 땀이 맺혔지만 표정은 밝았다.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이지만 100원에 컵 떡볶이를 먹는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극동 늘푸른 아파트 부녀회는 이날 아이들을 위해 떡볶이를 판매했다. 위진아 부녀회장은 “무료로 주고 싶었지만 무료라면 아이들이 가치 없이 생각 할까 봐 100원을 받았다”며 “떡볶이를 먹는 아이들이 너무 예쁘다”고 말했다. 세어보진 못했지만 100원짜리 동전으로 2만~3만원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위 부녀회장은 “색색의 풍선으로 팔찌를 하고 풍선 칼을 들고 밝게 웃는 아이들을 보니 이번 한 번으로 끝이 아니라 다음에도 열어도 될 만큼 반응이 좋다”며 “호응이 없을까 걱정됐는데 자신감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두정동의 랜드마크
1996년 12월 입주한 천안시 두정동 극동 늘푸른 아파트. ‘아파트에서 살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극동 늘푸른에선 이런 삭막함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정겹기까지 하다. 한 아파트에서 13년째 사는 주민으로 서로간에 정이 넘치기 때문이다.

극동 늘푸른은 몇 년 전 여러 가지 문제로 시끄러웠다. 각종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견해차로 갈등이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를 이해하고 오히려 격려해줄 정도로 가깝게 됐다. 시끄럽다는 게 알려지면 서로에게 피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진아 부녀회장은 “요즘은 안정을 찾고 너무 잘나가는 극동으로 변하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는 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울타리를 교체했다. 이경옥 관리소장은 “망가지고 녹슨 울타리를 교체했을 뿐인데 주민들은 새 단지처럼 변했다고 좋아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엔 천안시로부터 3000만원을 지원받아 CCTV를 설치했다. 좀 더 안전한 주거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매년 봄·가을에는 불우이웃돕기 바자회를 크게 연다. 부녀회는 바자회 때 부침개·장터국수·특산물 등을 판매한다. 판매기금으로 쌀과 라면을 구입해 불우이웃에게 기부하고 있다. 어버이 날이 있는 5월에는 효도잔치도 연다. 올해는 노인들의 쉼터인 벤치 안에 평상을 설치했다. 10명은 거뜬히 앉아 쉴 수 있는 넉넉한 공간으로 노인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가족과 친구처럼 지내며 돈독한 정을 나누는 천안 두정동 극동 늘푸른 아파트 입주민들. 이현구 노인회장, 위진아 부녀회장, 이창섭 입주자대표회장, 이경옥 관리소장(왼쪽부터) [사진=조영회 기자]

이창섭 입주자대표회장“은행마트 밀집해 편리”
“입주자대표 회장의 열정과 추진력으로 극동 늘푸른 아파트가 변하게 됐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주민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는 이창섭(54) 입주자대표 회장. 이 회장은 입주자 대표회와 부녀회 임원간에 원만한 관계를 맺으면서 아파트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해결하고 있다. 다음은 이 회장과의 일문일답.

-극동 늘푸른은 어떤 아파트인가.
“나무가 많고 높게 자라 늘 푸르기 때문에 극동 늘푸른 아파트다. 13년이나 된 아파트로 시설은 오래 됐지만 그간 쌓인 정으로 주민들간 사이가 돈독하다. 은행·대형마트·학교가 가까이에 있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게 자랑이다.”

-회장으로 재선출됐는데.
“직장 때문에 아파트 일에 올인 할 수 없지만 내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이지 않나. 나도 살기 좋은 아파트에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살피고 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은 단지를 돌아보고 불편함이나 문제점을 찾고 있다. 부녀회장이 가정주부다 보니 도움을 많이 요청하고 있다. 언제나 귀담아 들어줘 고맙다.”

-의견을 잘 듣는 입주자대표라는데.
“아파트 일을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모든 일은 주민들과 협조하면 자연스럽게 풀어진다. 부녀회·노인회·통장·동장의 의견을 듣고 함께 해결하고 있다. 노인회는 아버지고 부녀회는 오누이라고 생각한다.”

-활동기간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은.
“작년 아파트 임원들의 화합을 위해 대천으로 야유회를 갔다. 발 묶고 달리기, 몸빼바지 빨리 입고 달리기, 배구 등 게임을 하면서 친목을 다졌다. 가는 길은 서먹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가족·친구가 됐다. 이후로 임원들은 아파트 일이라면 더욱 자신의 일처럼 나서게 됐다.”

-앞으로의 계획은.
“사실 우리 아파트는 개선돼야 할 점이 많다. 우선 아이들의 공간인 놀이터가 개선돼야 한다. 인도도 마찬가지다. 체육시설이 부족해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다. 내부적인 리모델링도 필요하다. 저렴한 가격에 시공할 수 있도록 업체에 의뢰해 방향을 정할 것이다.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 백경미 인턴기자
백경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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