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모범답안 완결답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년전 대선에서 이겼던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일산 자택에서 많은 국내외 인사와 만났다.

제임스 울펀슨 세계은행 총재도 그중 한사람이었고 그 자리에서 金대통령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를 천명, 세계은행과 함께 서울에서 국제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내년 2월 예정으로 준비되고 있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국제회의가 그것이다.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오느니 안오느니 하는 얘기도 흘러나오지만, 이번 회의는 유명인사보다도 때가 때고 주제도 주제니만큼 무슨 메시지를 전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모범답안은 이미 나와 있고 길도 보이며 이제는 실천하고 널리 알려 신뢰를 되찾는 일만 남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제대로 된 국제회의라면 채점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다.

당장 엊그제 전경련을 찾았던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교수.학생들부터가 "기업구조조정에 정부가 지나치게 압력을 넣거나 개입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이 쌓은 경제의 얼개를 金대통령이 뜯어내기 위해 독재자 朴전대통령이 썼던 압제적 수단을 쓰는 것은 아이러니" 라고도 했다.

이번 회의에는 더 수준높은 인사들이 올 테니 발언도 더 수준높게 나올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예컨대 "한국경제는 과연 시장경제인가" "보수.진보처럼 본디 갈등하게 마련인 시장경제.민주주의를 한국은 어떻게 조화시키려는가" 정도는 나와야 격에 맞을 것이다.

딱한 것은, 법개정 문제도 아닌 '빅딜' 을 놓고 그예 대통령이 정치인.고위관료.대기업총수들을 한자리에 불러다 다그치니 안되던 일도 돼가는 모습을 국제사회는 시장경제로도, 민주주의로도 안본다는 점이다.

그들은 서울 물정을 잘 모르니 그런다 치자. 그러나 '개혁한다는 말뿐일' 대기업들 속내도, '기업 발목이나 잡을' 관료사회의 고질도, '기업 로비에 넘어가기 십상인' 정치판의 물정도 다 잘 아는 우리가 봐도 분명 시장경제는 아니다.

다만, 서버리고 말 경제를 일단 돌리고 뜯어고치려면 '시장경제를 위한 시장경제의 희생' 은 불가피함을 알 텐데 "딴 나라에서 왔느냐" 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려는 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을 했다면서 여태 시장경제.민주주의라는 '출발선상의 경구 (警句)' 를 되뇌야 하는 짓을 이번에는 끝내야겠고, 그러려면 개혁의 완결답안을 생각해야겠기 때문이다.

답안은 권력의 견제.분산, 법에 의한 지배다.

시장경제.민주주의가 만나는 유일한 합일점이 거기다.

거기에서부터 비로소 진정한 개혁은 서로의 합의에 따라 벽돌 쌓듯 이뤄질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세계은행으로부터 받아든 모범답안에도 이런 것은 없다.

대기업 개혁도 손봐야 하고 공기업개혁.규제완화에 이어 정치개혁까지 가려면 길이 먼데 무슨 비약 (飛躍) 이냐고 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최종 좌표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개혁은 달라진다.

보기로, 대기업 그룹은 정치권력에 의한 규제.지원의 결과지 시장경제의 산물 (産物) 이 아니다.

이른바 '문어발' 을 더 펼 수 있는 기회를 시장 아닌 정부가 제한하고, 일단 그 관문을 넘으면 밉보이지 않는 한 넘어가지 않게 받친다는데 어떻게든 '발' 을 들이밀지 않고 어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때는 외국기업도 정부가 막아줄 때고. 또 관료.금융의 목을 쥐고 있는 것은 정치권력이었고 - . 이런 판을 국내외로 깨기 위해 다시 청와대회의에서 '빅딜' 을 성사시킬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백번 이해하기로 하자. 그러나 이번으로 이같은 청와대회의는 끝내야 하고 그러려면 개혁의 최종 좌표는 정말 시장경제.민주주의에 두어져야 한다.

참고로, 내년 회의를 위해 두 사람만 천거하자. '법에 의한 지배' 로 가장 적당한 연사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다.

민주주의.시장경제를 실제로 성취한 사람이다.

'제3의 길' 은 대처의 업적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시장경제의 아버지' 로 불리는 밀튼 프리드먼 교수는 62년에 이렇게 썼다.

"자유에 대한 위협을 피하면서 정부로부터 편익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미국 헌법에 담긴 두 가지 보편적 원칙이 답을 준다. 첫째는 정부의 활동범위는 제한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일, 사적 계약을 이행시키는 일, 경쟁적 시장을 육성하는 일이어야 한다. 둘째는 정부의 권력은 분산돼야 한다는 것이다. "

김수길 워싱턴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