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군기위기,북한군 접촉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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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군기 (軍紀) 의 위기상황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얼마전까지 건군 50주년이다, 국민의 군대다 해서 시내행진소리가 요란했건만 최근 군에서 터지는 일들은 군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사회의 다른 분야는 나름대로 개혁의 모습을 보이는데 군만은 변화가 미미해 답답하고 걱정스럽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만 따져도 잠수정.간첩선.무기도입 비리에다 미사일 오작동, 조명탄 오발, 불발탄 폭발이라는 육해공 사고 시리즈가 이어졌다.

대통령의 군기해이 성토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판문점의 한국군 병사들이 북한측과 접촉한 유례없는 군기문란이 터졌다.

"다시 사고가 나면 스스로 물러나겠다" 는 국방장관의 말이 나오자마자 철책근무중에 수류탄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군 (大軍) 의 조직이다 보니 장비결함.실수로 인한 안전사고는 늘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사건들의 성격으로 볼 때 일반의 우려는 이미 그런 이해의 수준을 넘었다.

국민은 "군은 근본적으로 개혁돼야 한다" 는 인식을 갖게 됐다.

군은 지난 7월 국방개혁 5개년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군사령부통합 등 주로 규모의 구조조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을 뿐 군기쇄신 같은 의식개혁은 제시되지 않았다.

사실상 알맹이 개혁은 추진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 들어 군은 다른 분야에는 없는 고민을 안게 됐다.

군기란 상당부분 주적 (主敵)에 대한 긴장감과 적대감 위에 확립되는 것인데 정부의 대북 (對北) 포용.교류정책은 이를 약화시킬 가능성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도 확고한 안보야말로 햇볕정책의 전제이자 중요한 축이라고 누차 강조해 왔던 것이다.

여러 사건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우려를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현재까지 나타난 것으로 보면 판문점 경비병의 대북접촉은 지난 정권하의 일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군의 귀순으로 이런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 2월이니 지금까지 10개월여 동안 군이 이에 대해 제대로 조치하지 않은 것은 현 정부의 책임이다.

판문점은 남북교류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남북대치의 최전선이요, 양측 군기의 상징적 최접점이다.

일상적인 대면이야 피할 수 없겠지만 드러난 대로 한국군 병사가 군사분계선을 넘고 북측에 일방적으로 포섭된 듯한 행동을 보인 것은 한국군 군기에 대한 모욕이요, 심각한 위법행위가 아닐 수 없다.

金대통령은 참모총장 등 군지휘관들에 대한 경고.징계로만 그칠 게 아니라 이제라도 군통수권자로서 직접 군개혁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천용택 (千容宅) 국방장관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정부는 판문점 경비병 대북접촉의 전모와 군의 은폐의혹을 철저히 조사해 문책해야 한다.

아울러 관련소대의 지휘를 맡았던 김훈 (金勳) 중위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점까지 확실히 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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