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합병을 보는 미국의 이중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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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지구촌 재계는 요즘 초대형 인수.합병 (M&A) 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미국 1, 2위 석유회사인 엑슨과 모빌이 합쳐 세계 최대 석유회사로 부상하고, 도이체은행이 미 뱅커스 트러스트를 인수해 역시 세계 최대 은행으로 발돋움했다.

업계 톱 랭킹 기업들이 뭉치다 보니 오가는 돈이 보통 수백억 달러다.

이처럼 매머드급 합병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지만 독과점 문제를 우려하는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M&A가 워낙 대세 (大勢) 로 자리잡으면서 독과점 같은 것은 무시해도 좋을 부작용 쯤으로 치부되는 것 같다.

이는 세계경제의 글로벌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시장이 어느 한 나라 안에 국한되지 않고 지구촌 전체가 된 요즘이다.

각국의 주요 기업들은 더 이상 자국 기업이 경쟁상대가 아니다.

이런 환경변화가 독과점을 염려하기 보다는 다른 나라 기업들을 견제할 수 있는 초대형 M&A를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미국의 세계적인 항공기 제작회사인 보잉과 맥도널 더글러스 (MD) 의 지난해 합병은 그런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합병에 대해 미국에서는 독과점 시비가 거의 제기되지 않은 반면 유럽에서는 에어버스사가 받을 타격을 우려해 거세게 반발했다.

일찌기 1890년에 독과점금지법 (셔먼법) 을 만들어 독점의 폐해를 규제해 온 미국이지만 요즘은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이 법을 들이대려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한국의 빅딜 (대기업간 사업교환)에 대해 '현존하는 경쟁사간 합병으로 미국의 반독점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다' 는 지적이 워싱턴 주변에선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이다.

경쟁국을 위협하는 자국 기업들의 합병은 괜찮고, 다른 나라들의 유사한 움직임에 대해서는 관용할 수 없다는 이중적 잣대다.

이쯤되면 '힘의 논리' 에 바탕을 둔 자국 이기주의가 20세기말 자본주의의 또다른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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