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 옴부즈맨 칼럼]부실한 피노체트 판결보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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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새삼스럽게 우리말사전의 뜻풀이를 들먹일 필요도 없겠지만 '역사적' 이란 단어에는 적어도 세가지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역사상 오랜 세월을 두고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는 뜻, 그리고 셋째는 장래 역사로서 기록될 만할 것이라는 뜻이 그것이다.

어떤 뜻에서든간에 '역사적' 이란 말이 뚜렷이 입론 (立論) 될 수 있는 최근의 일로는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을 인정치 않기로 한 영국 최고 법원인 상원의 5인재판부 판결이 손꼽혀야 하리라고 믿는다.

이 판결은 '주권' 보다 '인권 (人權)' 이 앞선다는 것을 알리는 시대정신 (時代精神) 의 상징이라고까지 일컬어 진다.

아무리 국가원수였다고 할지라도 반인권적.반인류적 범죄를 저지른 자는 국경에 관계없이 처벌해야 하며, 그런 범죄자의 처벌에는 시효가 없다는 것을 이번 판결은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이런 일련의 판결을 보도한 우리나라의 매스컴은 '역사적' 인 것에의 분석과 풀이에 소홀한 구석이 적지않게 드러났다.

물론 예외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심층보도를 한 신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신문조차 핵심적인 내용에서는 미흡함이 여실하게 나타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주었다.

재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판결내용일 터다.

이번 영국 상원 5인재판부의 판결내용이 '역사적' 인 것이라면 마땅히 판결의 '요지' 를 구체적으로 보도했어야 하리라고 믿는다.

더군다나 5인재판부가 3대2라는 의견차이를 보인 끝에 최종 판결에 이른 상황에선 판사 개개인의 의견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상세히 알려주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외신이 전하는 재판광경과 판사들의 의견개진은 그야말로 '역사적' 판결이란 말에 걸맞을 정도로 극적이었다고 한다.

5인의 판사가운데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을 인정치 않기로 한 법적 판단을 내린 판사는 니콜스 (65).스테인 (66).호프먼 (64) 등 3인이었다.

니콜스 판사의 판결요지는 첫째로 국제법상 고문.유괴 같은 범죄는 누구에게도 용인될 수 없는 행위다.

국가원수가 직책을 수행하는 가운데 부정이나 위법한 행위가 있을 수 있을지라도 고문이나 유괴는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둘째로 고문이나 유괴를 국가원수의 직무로 인정할 수 없다면 피노체트는 국가원수로서의 면책특권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스테인 판사는 영국에서 국가원수에게 면책특권을 주는 것은 자명하지만 피노체트는 전 국가원수이므로 해당되지 않으며 대량학살.고문.유괴 등의 범죄는 피노체트가 직접 행한 것이 아닐지라도 '자기가 직접 사람을 때린 자와 남에게 명령해 때리게 한 자를 구별하는 것은 법정신에 어긋난다' 고 명확하게 밝혔다.

호프먼 판사는 니콜스와 스테인 두 판사의 견해에 동조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5인재판부의 재판장인 슬린 (68) 판사와 로이드 (69) 판사는 대량학살.고문.유괴 등과 관련된 피노체트의 경우는 개인의 행위라기보다 국가원수의 직무수행과 관련된 것이므로 국가원수 당시의 직무에 대해서는 면책특권이 있다고 밝히고, 만일 각국 정부가 오랜 기간동안 확립돼 온 국가원수에 대한 면책특권을 배제하고자 한다면 명확한 조건을 제시하고 시행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한나라의 법정에 맡길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런 판결요지는 '기록' 으로서의 가치라는 점에서도 더 상세히 신문에 실렸어야 마땅하다.

아울러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준다는 측면에선 입법부에 속하는 영국 상원이 우리나라의 대법원구실까지 하는 내력을 간략하게라도 보도했어야 하리라고 믿는다.

신문기사란 읽고도 궁금증이 계속 남게 해서는 자칫 '실격 (失格)'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이규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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