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관치와 직무유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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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빛은행이 행장도 아니고 행장인선위원장을 뽑는 데 10여일을 입씨름만 하더니 결국 인선위원들이 집단 사퇴하는 등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애당초 상업.한일은행의 초대 합병은행장 선임은 두 은행에 맡겨서 될 일이 아니었다.

두 은행은 역사로 보나 덩치로 보나 서로 엇비슷해 합병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온 게 사실이다.

인원정리 문제를 놓고 양 은행의 노동조합이 대립, 한바탕 집안싸움을 벌인 뒤 결국 양쪽 직원이 똑같은 수가 되도록 조정한 것만 봐도 그렇다. 하물며 초대 행장을 뽑는 데는 오죽하겠는가.

이런 마당에 은행 자율로 행장을 뽑으라는 것은 애당초 잘 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한빛은행은 정부가 94.6%의 지분을 가진 국책은행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살려놓은 은행인 만큼 국민을 대신해 정부가 은행 경영을 감시하고 견제할 책임이 있다. 95%의 지분을 가진 주주를 제쳐 놓고 두 은행의 경영진이 은행장 선임을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정부는 공개적으로 이 문제에 개입했어야 옳다. 낙하산인사식으로 행장을 시키라는 뜻이 아니라 행장을 뽑는 절차에 주주로서 공식적으로 참여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겉으로는 절대 간섭하지 않겠다고 장담해놓고 뒤로는 행장인선위원장을 내정했다가 들통이 나 파행상태를 초래했다.

그러자 뒤늦게 인선위원장과 위원장이 추천토록 돼있는 2명의 인선위원을 정부가 지명할 수 있도록 규정을 고치는 등 행장도 아닌 인선위원장 선임에 법석을 떨었다.

물론 정부가 나설 경우 관치(官治)금융의 망령이 되살아났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치와 직무유기는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과거처럼 엄연히 주주가 있는 시중은행의 인사에 정부가 개입하고 이를 끈으로 어디에 대출을 해주라 마라 하며 압력을 넣는 것은 분명 관치다.

그러나 5조원의 국민 세금이 들어간 은행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경영진을 뽑는 절차와 인선기준을 정부가 제시하는 것은 정부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면 뒤에서 어정쩡하게 할 게 아니라 전면에 나서서 투명하게 해야 한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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