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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아시아적 가치는 대안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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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어 - "민주주의 국가들은 자유롭지 못한 권위주의 국가들보다 더 유연하게 경제위기에 대응하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그래서 경제위기로 고통받는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그 소리를 오늘 여기에서 바로 지금 용감한 말레이시아 사람들로부터 듣고 있다. "

마하티르 - "나는 일찍이 이렇게 무례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 얼마전 말레이시아에서 개최된 아태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의를 앞둔 한 모임에서 고어 미 부통령과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간의 설전은, 경제위기에 처한 아시아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으로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 를 둘러싼 문제를 다시 한번 제기했다.

최근 경제위기를 경험하면서 국제사회나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도 '아시아적 가치' 를 복원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이 주장의 핵심은 유교적 가치체계.공동체적 문화.교육열.집합주의 등으로 집약되는 아시아적 가치를 되살려냄으로써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당한 정도로 아시아국가들의 위기와 혼란은 서구 물질문명의 몰 (沒)가치적.이기적 문화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전세계적 차원의 금융위기의 확산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된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중심적 가치체계 및 제도에 대해 민족주의적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이러한 아시아주의는 상당한 반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의 밑바탕에는 아시아와 서구를 분리시켜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고와, 전근대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가치체계를 정당화하려는 보수주의의 흐름이 짙게 깔려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따져보면 아시아적 가치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통사회에 내재했던 특징들이기도 하다.

예컨대 이슬람문화권의 교육열이나 공동체가치는 오히려 유교권을 능가할 정도지만 경제발전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

아시아적 가치의 긍정적 측면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아시아적 가치의 일면적이고 과도한 강조 속에서 '공동체주의' 의 명분아래 숨겨져 있는 권위주의적 위계질서와 반민주적 가치와 정향 (定向) 을 읽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얘기되는 동양적 혹은 한국적 가치 및 전통이 강조하는 '공동체' 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의 국제통화기금 (IMF) 위기 전에도 이미 한국사회에서는 서구보다 오히려 더 자기중심적이고, 분열적이며, 상호적대적인 약육강식의 가치체계가 팽배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여야간.노사간.지역간.계층간의 갈등은 이러한 부정적 측면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무책임.부정부패.공직윤리의 상실.약한 법질서 등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제대로 실천되는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부정적 현상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서구적 가치의 범람과 전통적 가치의 결여에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개인주의적 문화라고 쉽게 매도하는 서구사회에서는 오히려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한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다양한 의견과 삶의 모습을 포용하고 그것들간의 평화적 공존을 보장하는 일정한 공동체적 약속과 규율을 만들어냈다.

서구의 민주주의 사회는 시장의 발전과 병행해 그 부작용이 만들어내는 비인간적 무한경쟁과 불평등에 대항할 수 있는 가치와 제도를 발전시키는 데 또한 주력해 왔다.

열린 사회.자유.평등.박애 등의 가치가 서구문명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규정할 때 아시아적 가치는 비민주적 전제주의의 퇴행적 틀 안에 갇히지 않을 수 없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李光耀) 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가 주장하는 '아시아적 가치' 는 인류사회가 오랜 갈등과 학습을 통해 찾아낸 보편주의적 가치체계를 부정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미국의 정치학자 헌팅턴이 서구와 아시아문명이 화해할 수 없는 갈등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문명충돌론의 거울 이미지와 같은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한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발독재시대의 가치체계를 복원하고 경제위기에 대한 보수주의적 대응을 부채질하는 '아시아적 가치' 의 부활이 아니라, 인류가 근대사를 통해 성취한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체계와 제도를 우리의 요구와 조건에 맞추어 꾸준히 정착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심화, 시민권의 확대, 사회복지제도의 발전, 다양한 사상 및 삶의 방식간 상호공존의 모색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안된다.

최장집(고려대교수.정책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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