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측 손님엔 유독 ‘비싸게 구는’ 김정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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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분석]  현정은 방북 중 … 북·미 미묘한 게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북한을 방문하고 있는 가운데 북·미 간에 미묘한 외교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 김영일 외무성 부상은 10일 “조만간 조·미 관계에 중대한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조선광선은행을 금융 제재 대상 기업으로 지정하는 압박을 가했다.

현 회장은 12일에도 김 위원장을 만나지 못했다. 정부 소식통은 “오후 2시까지도 현 회장이 평양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북한 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함경남도 함흥시의 김정숙해군대학을 방문했다고 이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이 지방에 머물고 있어 면담이 불발되고 있다는 얘기다. 남은 건 이제 13일 오전 극적인 만남이 이뤄질 가능성이다. 개성공단 근로자 유모씨의 석방 문제도 아직까진 진전이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을 위해 평양을 찾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12일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울의 대북 소식통은 이날 밤 “현 회장이 평양에 머물고 있으며, 김 위원장과의 만남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방 현지지도에 나선 김 위원장이 평양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 언급이었다. 북한 관영매체는 김 위원장이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해군대학을 방문한 것으로 12일 아침 보도했다. 북한은 경호 문제 등을 이유로 구체적인 방문 날짜 등을 보도하지 않지만 함흥에 김 위원장이 체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지난 4일 면담한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여름 휴양을 겸한 군부대·산업현장 방문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 당국의 판단이다.

이처럼 남측 유력 인사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일단 평양으로 불러 놓고 막판까지 애를 태우게 하는 방식은 김 위원장 특유의 통치술이라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동안 북한은 남측에 김 위원장과 만나는 시간이나 장소를 사전에 약속해 준 예가 없다고 한다. 2000년 6월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도 김 위원장이 직접 순안비행장에 영접을 나올 것이란 확답이 없이 비행기 트랩에 올라야 했다. 같은 해 8월 말 남북 장관급회담 수석대표로 방북한 박재규 통일부 장관은 협상이 벽에 부닥치자 김 위원장과의 담판을 추진했다. 집요한 요구 끝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건 8월 31일 밤이었다. 김용순 노동당 통일전선 담당 비서와 함께 평양에서 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 이튿날 새벽 도착한 곳은 동해안 모처의 김 위원장 특각(별장)이었다. <표 참조>

이번의 경우에도 김 위원장은 면담 여부를 놓고 여론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할 때까지 뜸을 들이는 상황을 만들었다. 장기 억류 중인 개성공단 근로자 유모씨 석방의 관건이 될 현 회장과 자신의 만남에 쏠린 남한 내부의 눈도 의식한 듯하다는 게 당국자들의 진단이다. 상대를 거의 포기하거나 지치게 만든 뒤 ‘깜짝 면담’을 통해 자신이 대화 테이블의 주도권을 잡고 위상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는 풀이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김 위원장과의 면담 자체를 북한 당국이 협상카드로 쓰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고 분석했다. 평양 도착 당일인 10일부터 이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인사와 유씨 석방이나 금강산·개성관광 재개 등을 논의하는 상황에서 북측 실무자들이 면담 일정 확정을 미룬 채 현 회장의 보따리를 살피고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다. 이 연구위원은 “북측이 ‘현 회장께서 이 정도는 해 주셔야 저희가 장군님(김 위원장)께 보고하고 접견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펼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남주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도 “김 위원장은 현 회장이 우리 정부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가져왔고, 무슨 제안이 담겨 있나를 사전에 파악해 보라는 지시를 이종혁 부위원장에게 내렸을 수 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의 이 같은 ‘깜짝 면담’ 정치는 남한 측 인사들에게만 구사된다는 게 특징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접견에서 볼 수 있듯 미국이나 중국 같은 국가의 고위 인사 면담은 사전에 약속이 잡혀 진행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유독 남한에서 찾아간 정치권이나 재계의 유력 인사들에게만 고자세 스타일로 응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중 친선 발전의지 불변”=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함경남도 함흥대극장에서 북한군 장병들과 함께 연극 ‘네온등 밑의 초병’ 공연을 관람했다고 12일 오후 보도했다. 특히 공연 관람 뒤 김 위원장이 “장구한 기간에 걸쳐 마련한 조·중 친선을 더욱 공고히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당과 인민의 변함없는 의지”라며 “문화예술 교류는 두 나라 인민의 친선을 증진시키는 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다만 통신은 김 위원장이 언제 연극을 관람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를 계기로 중국이 유엔안보리 제재 결의에 참여해 북·중 관계는 다소 껄끄러워진 것으로 관측돼 왔다. 그런 만큼 북·중 관계 발전에 대한 김 위원장의 언급은 주목을 끌고 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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