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잔인한 달은 11월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고통의 인생은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하다.

망각의 눈 (雪) 으로 덮어 주고 메마른 구근 (球根) 속에 온기로 보존해 주는 겨울은 그래서 편안하다.

그러나 해마다 돌아오는 4월은 어김없이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고, 잠든 뿌리를 꿈틀거리게 한다.

이 고통스런 삶을 또 이어 가게 한다.

그런데 T S 엘리어트가 '황무지' 에서 노래한 잔인한 4월이 한국에서는 11월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왜 그럴까. 굳이 따지자면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가 엄습한 12월일 텐데. 이달 3일에 한국은 IMF와 굴욕적인 자금지원협정을 맺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11월이야? 뭐 '황무지' 에서 말한 기억 (memory) 과 욕망 (desire) 을 뒤섞는 달이 11월이기 때문이라고? 어디 그 사연을 들어 보자. ①97년 11월 전후 한국 경제관료들의 최대 관심사는 당면한 외환위기를 숨기는 일이었다.

기업은 기업대로 외국 현지에서 얻어 쓴 빚을 감추느라 애썼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바닥나기 시작했다는 외신보도는 오보 (誤報) 라며 경제관료들이 일전불사의 자세를 갖춘 것도 이때였다.

"뭐 우리의 갈 길은 IMF행뿐이라고? 아냐, 활로는 비밀주의밖에 없어!" 그래서 우리는 12월이 올 줄 몰랐다.

②비밀주의가 득세한 이유는 우리의 경제기초, 즉 펀더멘털이 강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 고비만 넘기면, 금융안정시책이 주효하면, 외국돈은 다시 돌아올 것이고 우리의 강력한 펀더멘털은 빚을 갚을 만한 돈을 벌게 해줄 것이다.

" (아 오만의 11월이여!)

그 펀더멘털이 너무나 취약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지금 세계는 한국경제의 회복력이 빠르다고 칭찬한다.

IMF.세계은행.미국정부 등이 한국경제가 바닥에서 벗어나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며 내년에는 성장으로 반전할 것이라고 말한다.그때는 펀더멘털이 강하다고 했고 지금은 회복력이 빠르다고 한다.

③불확실한 낙관론이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작년 이맘때도 98년의 성장이 6%대는 갈거라는 등 태평스런 예측들이 난무했다.

그때의 현안도 지금과 같다.

'무너진 대기업 어디로 가나' (기아만 빼놓으면 지금 똑같은 질문을 던져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 그때 무시된 경종 (警鐘) 소리가 지금은 더욱 큰데도 또 무시당한다.

"최악의 상황은 지나간 게 아니라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총외채가 1천5백억달러라면 국내총생산 (GDP) 의 50%를 넘는 것, 이를 해결하는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너무 비관하지 마셔. 그렇지만 우리 빚 좀 탕감해 달라고 외국은행에 어떻게 사정해?

아 낯이 뜨겁구나) .97년과 98년의 11월은 같다.

④기억은 과거며 상처뿐이다.

반면 좋아지기를 바라는 욕망은 미래이고 달콤하다.

이제 그 기억을 다시 되살려 상처를 크게 하고, 그럼으로써 달콤한 미래를 기약하자는 준비작업이 11월에 시작된다.

이름하여 경제청문회. 그러나 잊지 마시라. 상처가 두 배면 고통은 네 배다.

⑤보라. 현재 우리의 고통지수 (指數) 는 97년보다 14배나 커졌다.

대만사람보다 30배나 더 살기 힘들다는 조사통계가 나왔다.

실업은 늘고 물가는 오른다.

가출과 이혼은 증가하고 이른바 IMF형 범죄의 발생이 잦다.

사람들은 자신감을 잃고 방황한다.

결국 고비를 넘긴 것은 외환위기,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위기. ⑥드디어 최대 경제강국 미국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럴 때는 어떡해야 좋을지 누구에게 물어 봐야 한다.

갤브레이스 교수가 말한다.

"워싱턴당국이 치열하게 논의해야 할 주제는 어떻게 하면 죄 없는 일반국민의 고통을 최소화할 것인가 라는 문제다. " (아직 우리 곁에 있는 그 이름에 영광있으라!)

그러나 투자.생산.소비에 골고루 힘써야 할 한국의 경제주체들은 누구에게 묻는다? 탤런트 김혜자 (金惠子)가 답한다.

"기본은 안전이에요. 안전!요새는 맘 편한 게 제일이에요. "

김성호(객원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