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끝내야 할 대선 연장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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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작년 대선에서 이회창 (李會昌) 후보측이 소위 DJ비자금을 폭로했을 때 DJ의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할만하다.

역대 군사정권도 야당의 돈문제를 그렇게 정면으로 문제삼은 일이 없었으니 李후보측의 그런 폭로에 화가 나도 엄청나게 났을 것이다.

"세상에, 군사정권때도 없던 일을… 도대체 정치를 같이 할 위인이 못되는구만. " 아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李후보는 DJ측이 아들병역문제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져 급기야 큰아들을 소록도로 보내고 작은아들까지 키를 재는 소동을 벌였을 때 속으로 이를 갈았을지 모른다.

"경쟁상대는 나인데 애매한 아들을 끌어들이다니… 어디 두고보자. "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 정치가 비록 거칠고 험해도 돈.가족.여자문제 등에 대해서는 그래도 일정한 범위에서 자제하는 관행이 있었다.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더러 돈 먹었다는 비난과 축첩 (蓄妾) 문제 같은 것이 나오지만 총재급.대선후보 차원에서 그런 문제가 큰 쟁점이 된 일은 별로 기억되지 않는다.

YS의 아들 현철씨 문제는 당시 야당이 초기부터 알았지만 상당한 기간 문제 삼지 않았고, 그전 대통령들에 대해서도 사생활.가족문제 등에 관해서는 공격을 자제해 왔다.

역대정권도 비록 음성적으로 소문을 흘리고 돈줄을 죄기는 했지만 돈이나 가 족.여자문제 등을 두고 공개적으로 야당을 압박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험악하게 싸우면서도 서로 최소한 범위의 자제는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난 대선의 경우 그런 최소한 자제의 선도 무너져 버렸다.

돈.가족문제라면 당사자의 인간.인격의 문제인데 그런 문제를 가장 큰 쟁점으로 삼아 무지막지한 공방을 벌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39만표, 1.7%의 차이로 승패가 갈라졌다.

진 쪽은 꽃을 보내 결과에 승복하고, 이긴 쪽은 정치보복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렇게 험악했던 대선이 투표결과 하나로 칼로 자른 듯 끝이 나고 그 다음날부터 평화와 화합이 찾아올 수는 없는 법이다.

대선때의 악감정.증오.원한이 물위로, 물밑으로 흐를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대뜸 야당은 총리임명동의를 거부해 버렸다.

여당은 의원사정과 빼내가기를 시작했다.

대선은 끝났어도 대결은 끝나지 않고 형태를 달리한 대선의 연장전이 계속된 것이다.

칼자루를 잡은 여당이 야당을 몰아붙이면서 드디어 패배한 진영의 돈문제.선거운동과 관련되는 이른바 세풍 (稅風).총풍 (銃風) 사건까지 나온다.

이 과정에서 다시 李총재의 가족 (동생) 이 문제 되고, 李총재는 "대통령가족 및 친인척 비리를 파헤치라" 고 소속의원을 독려한다.

서로 주고 받는 말도 독할 대로 독해져 야당총재에게 석고대죄하라는 말까지 나오고, 보통 "후안무치 (厚顔無恥) 하다" 고 하면 될 것을 "후안무치의 극치" 라고 한 단계 더 나간다.

대선때의 험악함이 8개월 후까지도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여야간에 이런 대선 연장전이 계속되는 바람에 많은 일반국민들도 마음 속의 연장전을 계속 치를 수밖에 없었다.

호남사람들은 더 여당을 지지하고 영남사람들은 더 야당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사안 (事案) 별로 옳은 쪽을 지지하고 그른 쪽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쪽이 논리가 밀리면 오히려 안타까워 더 그쪽을 감싸려 한다.

잘하면 박수를 보내야 할 텐데 싫어하는 쪽이 잘하면 오히려 더 약점을 밝혀 내려 한다.

이렇게 되니 여야간 대결만 있을 뿐 옳고 그름의 구별이 희미해져 누가 암까마귀고 누가 수까마귀인지 모를 세상이 돼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결과는 무엇인가.

정치는 국민불신의 폐허가 되고, 정치인은 모조리 박덕 (薄德) 하고 왜소하고, 돈이나 밝히고, 간에 붙고 쓸개에 붙고… 하는 흉악한 이미지의 경멸대상이 돼버렸다.

경제위기 속에서도 국론은 모이지 않고 국정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

사회분위기는 풀어지고 미래를 향한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

대선연장전 8개월의 결과가 이것이다.

대선에서는 승자가 나왔지만 그 연장전에서는 패자만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 이런 연장전을 계속할 것인가.

연장전에서 쌓인 원한과 증오가 다시 연장전의 연장전을 부르지는 않을 것인가.

이제는 끝내야 한다.

마지막 선까지도 무시하는 막 가는 정치.독기 (毒氣) 정치를 끝내고 자제할 것은 자제하고 최소한 인간과 인격은 존중하는 정치의 새 그림을 그려야 한다.

어제 있은 두 대선주역 (主役) 의 만남이 그런 계기이기를 바란다.

송진혁(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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