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회장 “유씨 데려오도록 노력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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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10일 오후 평양에 도착해 2박3일간의 방북 일정에 들어갔다. 첫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고 통일부 당국자는 밝혔다. 당국자는 “현 회장 일행이 이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의 안내로 이날부터 시작된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현정은 회장과의 만남을 보다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11일 오후나 서울로 귀환할 12일 오전에 만나는 쪽으로 계획을 잡고 있을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현 회장이 평양에 도착한 지 3시간여 만인 이날 오후 8시18분 “현 회장이 아·태평화위원회의 초청으로 개성을 경유해 평양에 도착했다”며 비교적 신속하게 보도했다. 이 또한 면담 성사 가능성을 높여 주는 대목이라는 게 당국의 분석이다. 한 당국자는 “그냥 실무 차원의 협의를 하려면 현 회장을 굳이 평양까지 불렀겠느냐”고 말했다.

현 회장이 북한과 협의할 의제 중 첫째는 억류 개성공단 근로자인 유모씨의 석방이다. 공단 근무 중 북한 체제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넉 달 넘게 ‘조사 중’ 상태인 유씨의 송환은 현 회장이 꼭 풀어야 할 숙제다. 다행히 그동안 북한과의 물밑 접촉 등을 통해 8·15 전 석방 쪽으로 가닥이 잡혀 가는 분위기다. 그렇지만 현대와 정부 측은 무엇 하나 북한으로부터 약속받거나 보장된 것은 없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현 회장도 “유씨를 데리고 돌아올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이렇게만 본다면 현 회장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한국판 역할’을 부여받은 셈이다.

지난해 7월 북한군에 의한 남한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 사망 사건으로 중단된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도 중요하다. 현대아산의 핵심 경협사업인 데다 북한도 관광의 대가인 달러가 들어오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 당국자는 “현대와 북한이 관광 재개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는 상황이라 어떤 형태로든 논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 회장은 이 역시 “평양에 가 봐야 알 수 있다”며 말을 아꼈다.

북한과 관광 재개에 의견 접근이 이뤄진다 해도 ‘현장 조사와 재발 방지’등을 요구해 온 우리 정부가 어떤 선에서 받아들일지도 관건이다. 북측이 토지임대료와 임금을 큰 폭으로 인상해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개성공단 문제도 핵심 의제다. 이런 대북 현안 논의가 성과를 거두려면 현 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직접 대면이 필수적이라는 데 정부 당국과 현대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북한은 현 회장에게 각별한 예우를 하고 있다.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개성공단을 거쳐 평양에 이르는 육로 방문길을 열어 준 게 그중 하나다. 2007년 10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 참석차 방북하면서 이용했으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닫혀 있던 루트다. 북한이 오후 시간대에 군사분계선 통과를 허용하고 방북 협의에 군부의 통신망까지 가동한 것도 이례적이다. 현 회장은 장녀인 정지이 현대 U&I 전무와 실무진 한 명만으로 방북단을 단출하게 꾸렸다.

현 회장의 방북이 이뤄지자 현대아산 직원들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익명을 요구한 직원은 “금강산 관광은 피격 사건 진상 규명이 아직 안 돼 당장은 어려울 수 있지만, 개성관광은 북한만 동의하면 바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인들도 남북 관계 경색 탓에 위축됐던 주문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 개성공단기업협회 배해동(태성산업 대표) 부회장은 “운영자금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업체들이 있지만 지난달부터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주문량이 다시 늘어나는 기업들이 생기고 있고, 현 회장의 방북으로 더 고무적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임동 협회 사무총장은 “유씨가 석방된다면 막혔던 남북 교류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현 회장의 방북 성과에 대해 관심과 기대가 증폭되자 정부 당국은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이다. 한 당국자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현 회장이 억류 근로자와의 손을 잡고 귀환하는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인데 그런 극적 상황이 만들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영종·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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