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센 에어컨’ 핵심기술 중국에 넘어갈 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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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일하던 고모(51)씨는 2000년 3월부터 벤처기업 P사 대표를 맡았다. P사는 KIST가 특허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설립한 1호 벤처기업이었다. 연구원 측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일본에서 교수로 있었던 고씨가 대표이사로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고씨는 1999년 제2건국추진위원회가 과학기술 분야 신지식인으로 선정한 과학자였다. P사는 2007년까지 국가연구개발자금 200억원을 지원받았다.

고씨는 2007년 10월 P사 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중국에 벤처기업 I사를 설립했다. 고씨가 퇴직 당시 빼돌린 P사의 첨단 나노기술을 파는 데 이용할 위장 회사였다. 고씨는 지난해 4월까지 마치 이 기술들이 I사의 성과인 것처럼 속여 중국의 우주항공업체 및 대형 전자업체와 접촉했다. 러시아에는 독자적으로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국정원은 이 같은 내용의 첩보를 입수해 검찰에 알렸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는 부정 경쟁 방지 및 영업 비밀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고씨 등 2명을 구속기소했다고 9일 밝혔다. 이들과 공모해 LG전자 에어컨공장 배치 도면 등을 중국에 빼돌리려 한 혐의로 중소기업체 대표 등 2명을 불구속기소하고 달아난 I사 연구원 2명을 기소중지했다.

검찰에 따르면 고씨 등이 중국으로 빼돌리려다 적발된 기술은 첨단 나노기술인 나노파우더(NAP)·박막증착(ITO)·금속표면처리(OPZ) 기술 등이다. 이 가운데 금속표면처리기술은 에어컨 업계 세계 1위인 LG전자가 ‘휘센’ 에어컨에 활용한 원천기술이다. 에어컨 내부의 알루미늄 패널에 물방울이 맺히지 않게 하기 위해 기체를 가열해 생기는 플라스마를 코팅하는 방식으로 LG전자만이 상용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LG전자는 중국 경쟁 업체들이 이 기술을 적용해 10년 정도 에어컨을 판매할 경우 매출액이 1200억원 정도에 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고씨 등은 기술개발 비용인 80억원만 받고 이 기술을 팔아넘기려 했다.

그 외 유출이 시도됐던 다른 기술들도 이미 국내 유명 휴대전화에 사용되고 있거나(박막증착) 세계 유일의 기술이라 상용화할 경우 큰 수익이 예상되는 기술(나노파우더)이라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플라스마는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제4의 물체 상태. 보통 진공에서 기체에 에너지를 가하면 만들어진다. P사의 기술은 대기 중에도 플라스마 상태가 된다. 에어컨 알루미늄 표면을 이 기술로 처리하면 물방울이 맺히지 않고 그대로 흐르게 된다.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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