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기자구속은 직권남용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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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83년 4월 법조 출입기자 시절 겪은 일이다.

아침 일찍 대검 중앙수사부 1과장실을 둘러보고 나오다 마침 자기 방으로 들어오던 신건 (辛建) 부장검사와 마주쳤다.

순간 辛과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봤지? 봤지?" 만 연발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辛과장은 중수부 2, 3, 4과 전원이 매달려 한달 가까이 수사해 온 대기업 비업무용토지 재매입 부정사건의 실무책임자였다.

밤샘작업 끝에 수사결과 보고서를 16절지 한장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기자가 들어갔던 것이었다.

언뜻 보고 호주머니에 접어넣은 보고서 내용은 '9명 전원 불구속처리' 가 골자였다.

유명 대기업 총수가 몇명이나 구속될까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때라 큰 뉴스거리였다.

다음날 검찰이 발표했을 때 도하 신문들이 모두 1면 머릿기사로 쓸 정도였으니 하루 전에 쓴다면 엄청난 특종감이 틀림없었다.

책상 위에 복사해 둔 보고서 한장이 모자란 것을 확인한 辛과장은 기자의 손목을 붙잡더니 다짜고짜 김두희 (金斗喜) 중앙수사부장실로 끌고갔다.

그리고 金부장과 辛과장은 교대로 설득을 시작했다.

오전에는 법무.건설장관, 오후에는 국무총리에게 보고할 내용인데 신문에 먼저 터져 나가면 큰일난다는 읍소 반, 으름장 반이었다.

한편으로는 부속실 여직원과 계장을 불러놓고 기자가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도대체 뭘했느냐고 얼마나 호통을 치는지 민망해서 고개를 못들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기자는 다음에 다른 특종기사나 달라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믿기 어렵다는 듯 辛과장은 신문 마감시간까지 오전 내내 기자 곁을 맴돌며 송고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그렇지만 없어진 한장의 보고서를 찾기 위해 기자의 주머니나 수첩을 뒤지는 등의 무례 (無禮) 는 없었다.

서울동부지청 검사실에 들어가 컴퓨터에서 수사자료를 복사하던 국민일보 사회부 변현명 (邊賢明) 기자의 구속을 보며 떠오른 15년 전 과거다.

기자의 순수한 취재활동이 절도혐의로 사법처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자가 취재를 위해 자신의 출입처에 들어간 행위까지 주거침입으로 다뤘으니 검찰이 얼마나 이 사건을 감정적으로 처리했는지 알 만한 일이다.

邊기자의 취재방법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말이 아니다.

다소 부적절하고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잘못된 일이었지만 우리 언론의 취재관행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취재명목이라면 다소의 횡포까지 눈감아주던 악습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좋지 않은 관행을 물려줘 의욕 넘치는 입사 1년짜리 초년병 기자가 화를 입게 됐으니 선배들은 미안해 하고 깊이 반성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邊기자를 구속까지 한 것은 부당하다.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차원이 아니다.

오로지 국민의 알 권리, 즉 공익 (公益) 목적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보도 가치가 없는 자료였을 뿐만 아니라 미수에 그쳤기 때문이다.

재야 법조계나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검찰 내부에서조차 구속은 무리고 악수 (惡手) 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 않은가.

만일 검찰청사가 아닌 다른 행정기관에서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면 검찰이 기자구속으로 사건을 처리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내부자료의 잇따른 유출로 검찰이 곤욕을 치른 데 대한 분풀이와 겁주기 성격이 짙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는 바로 공권력의 횡포요, 직권남용이다.

이같은 형평성.공정성을 잃은 자의적인 법운용은 검찰에 대한 국민신뢰를 떨어뜨릴 뿐이다.

또 邊기자 사건을 검찰이 자초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93년 6월의 중앙일보 정재헌 (鄭載憲) 기자 구속사건을 교훈으로 삼으면 어떨까.

90%가 넘는 인기도를 자랑하며 언론의 뒷받침을 받던 YS정부가 권영해 (權寧海) 당시 국방장관의 명예훼손 시비끝에 鄭기자를 구속한 후 지지도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鄭기자는 1주일 만에 석방됐고 정권 출범 초의 '언론 길들이기' 는 실패했으며 소위 '문민정부' 는 언론탄압 정부로 낙인찍혔던 기억이 새롭다.

邊기자와 鄭기자 사건은 5년의 시차가 있지만 새 정권 출범 직후라는 점이 공통적이다.

이런 때일수록 공권력 남용은 새로 부상한 권력의 오만 (傲慢) 쯤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취재기자를 절도범으로 몬 일은 15년 전 군사독재 시절에도 없지 않았는가.

하루라도 빨리 邊기자를 석방해 새 정부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검찰에 충고하고 싶다.

권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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