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북한문화답사기]제2부10.정양사와 겸재의 '금강전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우리가 표훈사에 당도했을 때 능파루에는 젊은 여자 둘과 여군 한명이 일행이 아니라는 듯 자리를 따로 잡고 앉아 우리 쪽에 사뭇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걸 놓칠 내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북한 주민을 만나 일상적인 인사말이라도 건네며 살내음을 맡아 볼 수 있을까 그 틈만 엿보아온 참이었다.

나는 일행과 떨어져 곧장 능파루로 올라 양쪽을 반반으로 갈라보며 눈인사를 던졌다.

처녀들은 인사를 받고 고개를 외로 돌리며 내외의 뜻을 보였지만 여군은 깍듯이 목례로 답했다.

나는 처녀쪽에 앉아 여군에게 말을 던졌다.

"여긴 비가 안 왔습니까?" "많이 왔습니다.오늘 아침에야 개었습니다.어디서 오셨습니까?" "남조선에서 왔습니다. " "예에?" "왜 놀라십니까? 남조선 사람들은 처음입니까?" "처음입니다.외금강엔 간혹 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내강리까지 왔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듣고보니 놀랄 만도 했다.

예를 들어 내가 곡성 태안사 능파각에 앉아 있는데 웬 여자가 와서 "북한에서 왔습니다" 라면 안 놀랄 것인가."그냥 참관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남조선에 금강산을 자랑시키려는 대표단으로 왔습니다. " 그런 식으로 북한 용어에 북한 말투로 그들을 안심시키며 대답했더니 여군은 활짝 웃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이거 정말 잘 오셨습니다.금강산이 사람을 알아본다더니…일주일 내내 비가 오다가 좋은 분들이 좋은 일로 오시는 걸 알고 오늘 아침에 딱 그쳤습니다."

얼른 보기에 내가 가르치고 있는 여학생들과 비슷한 또래였으니 나이로 치자면 스물하나나 둘. 그 꽃같은 나이에 놋대야만한 군모에 빨간 작은 별을 단 것이 애처롭게 생각됐는데 여군은 나의 학생 그 누구보다 맑고 밝게 얘기를 이어갔다.

"비가 정말 많이 왔단 말입니다.그래서 정양사 (正陽寺) 로 올라가는 길이 무너져 내려 저 판도방 아바이들이 길을 고치고 있는 거랍니다."

"예에? 그러면 정양사에 못 올라갑니까?" "못 가십니다. " 순간 나는 크게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정양사에 못 올라간다니! 금강산이 알아보긴 뭘 알아보았단 말인가! 내가 아는 한 내금강의 핵은 정양사다.이중환의 '택리지' 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금강산 한복판에 정양사가 있고 절 안에 혈성루가 있다.가장 요긴한 곳에 위치하여 그 위에 올라 앉으면 온 산의 참 모습과 참 정기를 볼 수 있다.마치 구슬 굴속에 앉은 듯 맑은 기운이 상쾌하여 사람 뱃속 티끌까지 어느 틈에 씻어 버렸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이상수 (李象秀) 라는 19세기 문인은 '동행산수기 (東行山水記)' 에서 "정양사가 금강산에 있음은 마치 궁실에 대청이 있음과 같다" 고 했다.

또 김창협 (金昌協) 이 금강산을 구경하려고 회양에 들렀을 때 아버님 친구인 회양부사 임공 (林公) 이 "금강산은 부질없이 시일 허비해 구석구석 볼 것이 아니라 정양사에만 오르면 온 산의 면모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며 더 묵어가라고 붙잡았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진실로 조선적인 산수화를 창출해낸 겸재 (謙齋) 정선 (鄭.1676~1759) 의 진경산수 (眞景山水) 라는 것은 바로 금강산을 그리면서 완성된 것이었고 그 금강산 그림 중 백미라 할 '금강전도 (金剛全圖)' 는 다름아닌 정양사 혈성루에서 바라본 풍경이었으니 거기는 진경산수의 기념비적 현장이었다.

나는 금강산에 가면 정양사 혈성루 앞, 봉우리마다 손가락으로 가리켜 알려준다는 지봉대 (指峯臺)에서 비로봉.중향성.일출봉.월출봉.혈망봉.망군봉을 손가락 점찍으며 읽어보고 겸재가 과연 어떻게 생긴 풍경을 그런 식으로 화폭에 옮겼는가를 살피고자 했다.

그래서 그가 그린 '금강전도' 9폭을 모두 사진으로 만들어 갖고 갔다.

'금강내산총도' (신묘년 풍악도첩.36세) , '금강전도' (호암.59세) , '금강내산' (간송.67세) , '금강내산총도' (고대) , '봉래전도 횡축' (호암) , '풍악내산총람' (간송.채색본) , '선면 금강전도' (개인.수묵) , '정양사' (국박.부채) , '봉래전도 8곡병' (개인.담채) . 나는 가방에서 이 사진들을 꺼내 여군에게 보여주며 겸재라는 화가가 금강산 와서 그림 그린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귀만 이쪽으로 세우고 있던 처녀들도 자리를 함께 하며 내가 봉우리마다 아는 대로 일러보니 신기해 하면서 '이다.

아니다' 를 다투었다.

나는 처녀들에게 물었다.

"그래 이 그림들이 정양사에서 본 금강산이 맞습니까?" "맞긴 맞는데 아닌데요. " "뭐가 맞고 뭐가 틀린가요?" "쭉 펼쳐진 건 맞지만 위로 솟은 건 다릅니다. "

"정양사 안쪽엔 소나무가 많고 건너편엔 바위산이 많은 것도 맞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면 알겠습니다. "예상한 대로 겸재의 '금강전도' 는 "실경 (實景)에 기초하면서 결국은 실경을 뛰어넘은 그림" 인 것이다.

정양사에서 내다본 풍경을 그리면서 이를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마치 직승기 (헬리콥터) 를 타고 공중에서 내려다 보기라도 한듯이 대관적 (大觀的) 구도를 구사한 것이다.

"겸재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이하곤 (李夏坤) 의 말을 빌리면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전신 (傳神) 수법에 가까웠다."초상화를 그릴 때 겉모습만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 리얼리티의 정신까지 그리는 자세와 같았다는 것이다.이런 것을 옛 사람들은 이형사신 (以形寫神) , 즉 형상에 기초해 정신을 그린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주문이다.

형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는 차라리 쉬운 일이지만, 형상에 기초하되 보이지 않는 내재적 진수까지 담아내라고 하다니! 그래서 당대 최고의 미술평론가였던 강세황 (姜世晃) 은 "진경을 그리는 사람은 항상 지도 (地圖) 처럼 될까 걱정하는데 실경에 흡사하면서도 화가의 제법 (諸法) 을 잃지 않아야 된다" 고 경고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겉모습이 아니라 속모습을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옛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이형득사 (離形得似) , 즉 형상을 버려야 비슷함을 얻어낸다고 했다.

지금 금강산 처녀들이 겸재의 '금강전도' 를 보면서 "맞긴 맞는데 아닌데요" 라고 말한 것은 미술사 용어를 쓰지 못했을 뿐이지 이형사신과 이형득사의 미학을 증언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정양사에서 찾고자 했던 물음의 정답을 바로 찾은 셈이었다.

나는 정양사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는 그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금강산 처녀들은 내가 맘껏 쥘 수 있도록 손을 반듯이 길게 펴주었고 여군은 그쪽에서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다음회는 '만폭동' 편입니다.

글=유홍준(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김형수(통일문화연구소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