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한시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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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이더라(登泰山而小天下)고 한 사람은 공자였다. 이 고사에서 탄생한 시가 두보의 ‘망악(望嶽)’이다. ‘반드시 정상에 올라 뭇 산들의 작은 모습을 보리라(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2006년 4월 백악관 만찬장에서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이 구절을 읊었다. 언론들은 당장의 미·중 관계엔 무역 불균형과 위안화 절상 문제 등 이견이 있지만 크게 보면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루 전날 보잉사 초청 오찬에선 이백의 시 ‘행로난(行路難)’을 인용했다. ‘바람 타고 파도 헤쳐 갈 때가 반드시 오리니, 돛을 높이 달고 큰 바다 건너리라(長風破浪會有時, 直掛雲帆濟滄海)’. 이 역시 미·중 관계의 발전을 다짐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두 시 모두 언젠가는 중국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의지는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1995년 10월 청와대를 방문한 장쩌민 주석은 두목의 ‘산행(山行)’을 암송했다. ‘서리맞은 잎새가 봄꽃보다 더 붉네(霜葉紅於二月花)’. 때마침 단풍철에 접어든 계절을 상찬하기 위한 인용일 수 있다. 하지만 중문학자 이영주 서울대 교수는 이 속에도 외교적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본다. 이제 갓 3년이 지난 한·중 관계(상엽)를 오랜 북·중 관계(이월화) 못지않게 발전시켜 보자는 메시지란 것이다. 이처럼 외교 석상에서 한시 구절이나 고전 또는 고사성어를 인용하는 것은 중국 지도자들의 오랜 전통이다. 적절한 인용으로 회담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때론 적절한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기도 하지만 그 배경엔 자국 문화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G2 시대 출범의 서곡’이란 평가 속에 지난주 워싱턴에서 막을 내린 제1회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는 『맹자』 진심(盡心)편의 한 구절이 등장했다. 다만 인용을 한 사람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었고 그래서 중국어 원문이 아닌 영어 번역이었다는 점이 예전과 달랐다. 하지만 이를 두고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고 탓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 문화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오바마 외교의 한 단면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오바마의 ‘맹자왈’ 덕분인지 회담은 성공리에 끝났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외교뿐 아니라 무릇 인간관계가 그런 것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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