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라마고와 작품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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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95년 포르투갈 리스본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사라마고의 강연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 마른 체구, 잿빛 머리칼 등 70대의 노구였으나 자신의 문학적 주관이 강하고 소신도 투철한 예술가의 초상을 대면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혈기차게 주장하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삶의 경륜이 켜켜이 쌓인, '세상을 아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사라마고는 주로 포르투갈의 소시민과 소외계층을 테마로 택했다.

현실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역사 속의 사건에 비추며 비판적 시각을 유지했다.

때문에 그가 과거에 대해 쓰는 것은 현재를 해석하려는 문학적 장치에 해당한다.

그는 70년대까지 공산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가로 평가됐다.

40년대 포르투갈 문학의 주요 흐름으로 부상한 신사실주의적 경향을 이어받았기 때문. 신사실주의는 계급투쟁.빈부계층 등에서 발생한 갈등을 고발.폭로했던 사조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정치적.투쟁적 색깔보다 일반 사회적 현상에 주제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60년대 프랑스 누보 로망에 큰 영향을 받아 사회문제를 드러내고 꼬집기보다는 옛날 사건에 빗대 새롭게 구성하는 방법을 택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왕정시대의 정치우화 '수도원의 기억' 은 이 작업의 결과였다.

문체에 있어서도 단락을 구분하지 않고, 대화 부분도 따옴표로 묶지 않은 채 직접화법으로 서술하는 등 소설 속 허구와 역사적 현실을 혼동케 한다.

때문에 그의 작품을 해독하려면 독자들의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보르헤스 등 허구와 현실의 겹침이 심한 남미쪽 환상주의 작가와 달리 비판적 사실주의 경향을 튼실하게 유지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한국에 소개가 안된 이유는 난해한 문체와 제3세계 문학에 대한 우리의 관심 부족. 그러나 포르투갈이라는 제한된 지역의 역사를 형상화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크다.

한국 고유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다룬 작품도 제대로 번역되면 세계문단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늦게나마 그의 작품이 한국독자들에도 선보이길 기대한다.

송필환 교수 (한국외국어대.포르투갈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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