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김대통령의 역사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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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대한민국 50년 - 우리들의 이야기전' 에서 한 즉석연설문을 뒤늦게 읽고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월간조선 10월호 수록) .한 전시장의 개막 축사지만 현직대통령의 현대사 인식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대의를 요약하면 이렇다.

金대통령은 현대사 50년을 건국.호국.근대화.민주화 4단계로 간결하게 정리하면서 우리 현대사를 '도전과 응전' 의 시련을 겪어 낸 성공의 역사로 평가한다.

그는 건국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李承晩)에 대해 조건 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출발에서부터 가혹한 도전에 직면했지만 성공적 응전으로 나라를 세운 건국' 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는 6.25를 '세계 공산세력의 전략적 의도' 라고 보고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은 호국의 의지와 값비싼 희생을 찬양한다.전쟁의 폐허 위에서 경제재건의 도전 결과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위업을 세운 세번째 근대화 단계다.

권위주의정권으로부터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이 지금의 민주화 성취 단계다.

도전과 응전의 시련 속에 영광의 역사를 창출했던 우리는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서 가혹한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과거의 영광만 반추할 것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행운의 여신은 언제나 미소 짓고 아름다운 얼굴로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험하고 으르렁거리는 얼굴로 온다. " IMF의 얼굴이 바로 그렇다.

위기 아닌 새로운 도전의 기회다.

50년 영광을 주도해 온 건국.호국.근대화.민주화세력이 힘을 합쳐 이 도전에 슬기롭게 응전한다면 세계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낙관을 역설하고 있다.

金대통령의 역사관은 긍정적 낙관론에 기초한다.

개인이든 나라든 지난 삶의 궤적에는 남루하고 추한 역사도 들어 있게 마련이다.

비록 부끄럽고 추한 과거지만 그것이 남의 과거 아닌 나의 과거고 그 오욕의 역사를 딛고 일어선 오늘을 귀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긍정적 역사관이다.

또 그는 과거보다 미래를 중시한다.

어제의 영광과 오늘의 성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의 자세로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고 내일을 열자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미래지향적 역사인식이다.

그는 또 명분보다 실리 (實利) 를 추구한다.

대통령 취임후 자주 쓰는 실사구시 (實事求是) 라는 용어 또한 유교적 명분론보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실물경제론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金대통령의 역사관이 긍정적.미래지향적.실리추구적 가치관에 근거한다고 볼 때, 현실정치는 어떤 형태로 구현돼야 하는가.

과거지향 아닌 미래지향의 정치다.

과거 단죄나 역사의 단절, 개혁명분론에 치우쳤던 지난 정권과 달리 화해와 협력으로 21세기를 여는 통합의 정치여야 한다.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 21세기 파트너십을 맺자는 그의 한.일관이나 북한을 교류.협력을 통해 감싸안자는 대북 (對北) 정책 또한 통일이라는 장래를 중시하는 그의 역사관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국내 정치현실은 어떠한가.

비록 돈 안 먹는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 차원의 사정이라고는 하지만 그 방식이 지난 정권에서 흔하게 봐 온 한풀이 사정으로 흐를 우려의 징조가 보인다.

과거악 (惡) 은 차단돼야 한다.

그러나 명분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사회적 통합력을 잃을 수 있다.

개혁에는 다수가 찬성하면서 사정방식에는 부정적인 여론의 향방에 주목해야 한다.

위기는 도전의 기회고, 이를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자면 흩어진 사회세력을 통합하는 리더십의 확보가 가장 시급한 과제다.

그러나 사회 저변에는 흔쾌한 동참을 거부하는 무언지 모를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진보와 보수가 갈등하고 동과 서의 반목이 치열해질 조짐이다.

미래설계가 바쁜데 과거 단죄와 과거 결별의 목소리가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다.

경제는 어렵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데 어째서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도 불고 있느냐는 냉소주의가 생겨날 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가 결성됐다.

국난극복과 민족의 재도약을 이룩하기 위한 사회 제세력의 결집이다.

나는 이 단체가 金대통령의 역사관을 현실정치로 구현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기를 당부한다.

JP가 말한 '증오와 협량 (狹量)' 에서 벗어나 과거와의 연대속에서 재도약의 응전자세를 가다듬는 통합의 정치를 일궈내기를 기대한다.

권영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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