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도 사는 것에 익숙해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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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 2인자로 등장하는 미실(고현정 분).

포브스코리아세상 모든 성공론은 1인자를 위한 것이다. 하나같이 ‘최고’가 되는 비법만 제시하고 있다.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다.

최고가 아니면 2등이든 3등이든 꼴등까지도 ‘그 외 나머지’로 간주하는 것이 세상 인심이며 역사도 2인자는 주목하지 않는다. 타이틀에 ‘부(副)’자를 달고 사는 2인자 중에는 ‘부’자를 떼는 경우도 있지만 세상에는 2인자가 1인자로 등극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 조직이 훨씬 더 많다.

절대 권력이 존재하는, 주인이 명확한 조직에서는 더욱 그렇다. 2인자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어렵다. 영화 <넘버3>의 태주(한석규 분)와 재떨이(박상면 분)는 2인자(넘버2) 자리를 놓고 싸운다.

이병헌 주연의 영화 <달콤한 인생>이나 송강호의 <우아한 세계>는 2인자가 끝내 1인자와 사투를 벌이지만, 이들 역시 1인자 자리를 넘본 것은 아니다. 보스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거나 보스의 동생을 죽게 해 2인자 위치가 위태롭게 된 것이다.

가끔 주인공만큼이나 그와 대립하는 2인자가 부각되기도 한다. 지난해 방영된 TV 사극 <이산>이 그런 작품이다. 정조를 끊임없이 제거하려는 정순왕후(김여진 분)는 <장희빈> 등 기존 사극에 나오는 ‘미인계’ 여성 파워와는 달리 정치에 강한 2인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하지만 2인자 권력의 진면목은 요즘 장안에 화제인 MBC 사극 <선덕여왕>이다.

제목도 주인공도 선덕여왕(이요원 분)이지만, 왕권에 대적하는 2인자 ‘미실(美室겙灼痴·고현정분)’이 더 주목 받는다. 독설을 쏟아내면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잃지 않는 ‘악녀’ 미실은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은 2인자의 생명력과 처세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평균 시청률 30%를 웃도는 흥행은 확실히 미실의 공이 크다.

실제 역사에서 그랬는지, 드라마 속에서 창조된 인물인지 알 수 없지만 미실은 틀림없이 권력 다툼의 한복판에서 2인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치열하고 치밀한 생존 전략을 요구하는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도대체 미실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2인자로 건재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 것일까. ‘지속가능 한’ 2인자의 DNA는 과연 무엇인가.

모든 정보를 독점하라

2인자가 1인자를 견제하기 위해선 아래에서 올라오는 모든 정보를 필터링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정보라도 1인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만큼 2인자에게 위험한 것은 없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것도 백성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서였고, 2인자를 자처하는 중신들이 결사 반대했던 것도 2인자 자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2인자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정보를 검열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차단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도 금물이다. 측근이라도 함부로 정보를 공유해선 안 된다. 1인자의 비밀도 자신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1인자를 계속 견제할 수 있으며 토사구팽의 위험도 막을 수 있다.

미실은 특히 이 부분에서 철두철미하다. 이른바 ‘사다함 매화’의 비법은 남편 세종(독고영재 분)은 물론이고 내연남이자 자신의 책사 격인 설원랑(전노민 분)조차 알지 못하게 했다. 궁금했던 둘은 아들들을 시켜 미실을 미행하게 했는데, 미실은 이런 첩보까지 접수할 정도로 대단한 정보력을 보여주었다.

미실은 “비밀을 다 공유하려면 서로의 일을 다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소리쳤다. 세종이 화백회의를 장악하고 통솔하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설원랑이 병부령 대장군이 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이야기해야 되겠느냐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미실은 아예 쐐기를 박았다.

“오직 이 미실만이 알고 있습니다. 미실만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걸 알고자 한다면 바로 미실이 되겠다는 것이며 천하의 미실이 둘일 수 없으니 미실이 되고 싶다면 나를 베면 될 것 아닙니까.” 두 아들은 무릎을 꿇었고 세종과 설원랑도 할 말을 잃었다.

1인자엔 부드럽게, 아래엔 ‘부들’ 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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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영화 속 2인자들. 맨위부터 <선덕여왕>의 설원랑(전노민 분), 영화 <넘버3>의 태주(한석규 분), TV 드라마 <이산>의 정순왕후(김여진 분).
2인자에게 이중적 태도는 필수다. 1인자로부터 더 많은 권한을 위임 받기 위해선 끊임없이 충성스러움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위임 받은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아래를 호령한다.

1인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게 보이고 아래에겐 1인자보다 더 1인자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비겁함의 극치라는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2인자가 2인자 자리를 확실하게 굳히며 롱런 하는 처세다.

1인자 중엔 이런 ‘비겁한’ 이중적 2인자를 선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데다 무엇보다 자기 대신 악역을 도맡아 조직의 위계질서를 잡아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미실은 이 점에서 타고난 2인자다. 표독스런 악녀이면서도 세종과 단둘이 있을 때는 연약한 여인의 표정을 지으며 온갖 교태를 부린다. 남편의 품에 안기며 “제가 얼마나 의지하는지 모르십니까”라고 보호본능마저 자극한다.

하지만 그런 미실은 정적은 말할 것도 없고 백성에게까지 경멸의 대상이다. 백성은 미실을 ‘아이를 잡아먹는 악녀’라고 믿고 있다. 사실 그것은 미실 자신이 낸 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그러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실이 덕만과 나눈 대화에서 미실의 독재적 정치관이 잘 드러나 있다.

백성이 하루하루 힘들게 살고 있다는 덕만의 말에 미실은 “천 년 전에도 그랬고 천 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백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라고 말한다. 임금이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들의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는 말엔 “귀를 기울이면 모두 요구뿐이며 선정을 펼친다 해도 인간의 욕심을 채울 수 없는 법”이라고 했다.

올림픽 메달 색을 구별하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금은 금이고 은은 은이다. 금메달리스트가 은메달리스트에게 보내는 “정말로 상대하기 힘든 뛰어난 선수였다”는 평가는 최고의 찬사처럼 들리지만, 은메달리스트에게는 최악의 약올림이다. 1등이 만끽하는 기쁨의 높이는 절대로 2등이 통감하는 설움의 깊이에 빗댈 수 없다.

아예 올려다보지 못할 나무라면 미련도 없겠지만, 1인자보다 한 단계 아래이기에 2인자의 분함은 더 크다. 더구나 1인자에게 충성을 다하고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그 배신감은 말할 수 없다. 회사를 위해 청춘을 바친 전문경영인이 정작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2세에 밀려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오너의 사소한 홀대에도 분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2인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고수라면 그런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2인자는 수모를 감내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안다. 미실의 아들 보종(백도빈 분)은 가야 출신으로 김유신(엄태웅 분) 가문에 원한을 품은 부하를 사주해 김유신의 아버지를 암살하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알게 된 미실의 정부 설원랑이 보종을 꾸짖으며 한 말이 있다. “지고 사는 것에 익숙해지라 그토록 일렀거늘.” 설원랑도 미실만큼이나 2인자로 사는 것이 ‘지고 이기는 법’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미실은 분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1인자가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경거망동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미실의 대사는 관대한 듯하면서도 소름이 돋는다. “사람은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도전하는 자는 반드시 제거하라

2인자는 언제 누가 치고 올라와 1인자의 총애를 받거나 1인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그래서 아예 그럴 가능성이 있는 후보를 물색해 싹을 자른다. 미실은 후한이 있을 만한 정적에게 “떠나라”, “도망치거라”라고 말한다. “아주 멀리”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미실은 평소 이런 지론을 가지고 있다. “무서움을 이겨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도망치거나 분노하거나.”
천명공주(박예진 분)가 어렸을 때도 그런 말로 도망치게 했다. 공주가 복수하기 위해 다시 궁으로 돌아오자 미실은 공주를 껴안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공주님에 대한 연민이 이젠 남아 있지 않습니다.” 미실은 덕만을 통해 ‘도망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입을 것’이란 메시지를 천명공주에게 전하라고 한다. 미실은 어떠한 도전도, 도전할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는다. 진평이 칙서를 내려 가야 유민을 서라벌 밖으로 내친 것도 미실 때문이다.

1인자를 도울 만한 사람은 모두 내 편으로 만들고, 그러지 못하면 제거하는 것도 미실의 전략이다. 미실은 유신에게 “나의 적이 되지 말고 나의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천명공주의 오른팔인 유신을 회유한 것이다.

물론 유신은 “세주께서 절 얻으실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줄 안다”며 “절 죽여서 시신을 가지라”고 거절했다. 미실은 유신이 떠난 후 “인물이구나. 날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자는 처음”이라며 불길함을 감추지 못했다.

조작과 왜곡의 기술을 익혀라

조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음모는 2인자의 작품이다. 1인자와 구성원을 이간하거나 심지어 1인자의 판단을 흐려 2인자인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분위기를 몰고 가곤 한다. 미실이 ‘월식’ 퍼포먼스를 연출한 것도 그래서다. 수십 년간 준비하고 희생을 치른 역작으로 유신을 천명 곁에서 쫓아내는 동시에 자신의 주술적 힘을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꾸민 계략이다.

우선 간단한 과학원리를 이용해 미리 준비해둔 우물에서 ‘인력구(人力口)’라고 쓰여진 돌부처가 솟아오르게 하는 ‘쇼’를 벌였다. 미실은 “인력구(人力口)의 합자인 가(伽)자가 들어간 가야 출신을 쫓아내야 한다는 신의 계시가 내렸는데, 따르지 않으면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

미실은 책력(冊曆)을 읽고 개기월식에 맞춰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월식이 일어나자 흉조로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의 미실에 대한 공포감은 더욱 커졌다. 그 결과 미실은 왕권을 누르고 백성을 복종시켰다. 미실은 하늘을 이용하지만, 하늘을 경외하지 않는다. 세상의 비정함을 알지만 세상에 머리 숙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한다. “비밀을 알려줄까? 하늘의 뜻은 없다.” 미실의 부드러우면서도 무서움을 잃지 않는 눈빛이 압권이다. ‘사다함 매화’의 정체를 캐려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척 들어온 덕만의 작전을 간파하고도 “네가 천명의 첩자임을 모르리라 생각했느냐”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가서 천명에게 고하거라. 사다함의 매화는 책력이었다고.” 미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른다. “허나, 너희가 그것을 안들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 이임광 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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