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덕의 13억 경제학] 베이징(5) ‘만리장성을 깨트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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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만리장성입니다. 베이징 여행객들이 꼭 가는 곳이지요. 그런데 관광객들은 꼭 '빠다링(八達嶺)에만 갑니다. '하수'들이나 가는 코스입니다. '고수'들은 장성의 고즈넉함과 아름다움,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찾지요. 베이징에서 3시간 거리의 쓰마타이(司馬台)를 추천합니다. 산이 험한만큼 경치가 좋고, 잘 가꾸어지지 않아 역사가 묻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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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1988년 6월.

중국 CCTV에서 '허상(河殤)'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됩니다. 6회에 걸쳐 방영된 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중국인들의 머리에 깊숙하게 박혀있던 우상을 정면 공격했습니다. 충격이었지요. 그들이 '중화(中華)'를 얘기하며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던 만리장성, 황허(黃河),그리고 용(龍) 등이 재평가 됩니다. '허상'은 이 세 가지가 중국의 발전을 막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이라고 공격했습니다.

'허상'은 우선 중국 문화의 자부심으로 각인됐던 만리장성의 이미지를 산산이 파괴했습니다.

"만리장성은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됐으나 그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많은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만리장성은 너무 쉽게 뚫렸다. 만리장성은 거꾸로 한족의 북방진출을 막는 벽이었을 뿐이다. 중원의 한(漢)족은 만리장성 이남에 갖혀 밖으로 과감하게 나가려하지 않았다. 방어적이었던 것이다".

'허상'프로에서 만리장성은 중국의 고립을 가져온 장애물에 불과했던 겁니다.

중국 문명의 진원지였던 황허 역시 공격당합니다. '허상'은 중국인이 황허 숭배에 젖어 황허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영국 스페인 등이 푸른 바다를 항해하면서 새로운 부를 찾아 헤맬 때 중국인들은 진흙탕 강 황허에서 노를 젖고 있었다는 거지요. 14세기 이미 중국은 세계 흐름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상'은 이어 황제의 상징이었던 용에 화살을 돌립니다. 왕조 시절 누구도 용(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황제는 하늘이 인정한, 군림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다양한 사회,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고 '허상'은 공격합니다. 용은 바로 권위주의 관료주의 화신이었습니다.

이 프로를 통해 만리장성 황허 용 등은 현실안주 배타주의 권위주의 등을 상징하는 고질적인 중국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은 이 프로를 보면서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동안 소중히 여겨왔던 '우상'이 깨졌던 겁니다. 이 프로가 있은 지 1년 만에 텐안먼(天安門)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가 벌어졌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학생들은 이 프로를 통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를 축적했는지도 모릅니다.

만리장성은 북쪽 산에만 있지 않습니다. 외부와 벽을 쌓아놓고 안주하려 하고, 타인과의 교류를 배척하고, 서로 심리적 장벽을 쌓고....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있을 겁니다.

이야기 둘

1215년.

정복자 칭기스칸은 중원 땅을 장악하고 있던 금(金)나라를 향해 말머리를 돌립니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그는 만리장성에 부딪쳤습니다. 만리장성은 쉽게 깨지지 않았습니다. 초원에서 전쟁을 해왔던 그에게 아무래도 공성(攻城)전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포로들을 앞세웠습니다. 포로는 금나라 병사들이 성 위에서 쏘아대는 화살을 맞고 쓰러집니다. 시체가 쌓였습니다. 뒤 병사들이 시체를 밟고 성을 향해 다가갑니다. 그러다 또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시체는 성의 높이만큼 쌓여집니다. 그래도 성은 깨지지 않았습니다. 금나라 병사들도 죽어라 싸웠으니까요.

칭기스칸은 '이렇게는 안되겠다'라고 생각합니다. 대뜸 그는 군사들이 밥을 짖는데 사용하는 커다란 솥을 가져오게 합니다.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솥을 걸고, 기름을 부은 뒤 끓이기 시작합니다.

"얘들아, 포로를 데려와라"

그는 금나라 포로들을 튀기기 시작했습니다. 포로는 뜨거운 기름에 던져졌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튀김으로 변했습니다. 몽고 군은 저항하는 적군에 그만큼 잔인했습니다. 멀리 성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금나라 병사들은 사시나무 떨 듯 떨었습니다. 잘못하면 나도 튀김 꺼리가 되겠다는 공포감이 그들을 엄습했습니다.

금나라 병사들은 결국 사기가 떨어졌습니다. 혹 포로가 되면 튀김이 되고 말 거라는 공포감에 도망치는 병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만리장성을 그렇게 깨졌습니다. 칭기스칸은 쉽게 만리장성을 넘었지요.

아시아와 유럽에 정복 왕국을 건설한 칭기스칸은 한(漢)족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벽을 쌓지 않았습니다. 웅크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겁니다. 그는 오히려 벽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지구 촌'의 개념을 만들어낸 인물이었습니다. 인터넷의 효시라는 역참을 뒀고, 외래문화를 적극 받아들였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만리장성을 깨트린 칭기스칸은 한족을 철저히 유린했습니다. 벽 뒤에 숨어, 아옹다옹 지네들끼리 싸우고, 온 갖 못된 짓은 다하면서도 깨끗한 척하는 세력들은 그의 말굽에 짖밟혀졌습니다. 칭기스칸, 그가 보이지 않는 장성도 깨트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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