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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화유산 답사기]제2부. 6 내금강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평양에 도착해 북측 안내단과 첫 동석모임을 갖기 앞서 권영빈 (權寧彬) 단장이 '글쟁이' 3인에게 다짐하듯 물었다.

"이제 저쪽하고 일정을 확정지어야 하는데 세 분께서 세상없어도 꼭 가야 할 곳 하나씩만 말해 보십시오. " 고은 선생은 당신께서 이미 일곱권으로 쓴 '백두산' 을 말했고, 김주영 선생은 소설 '화척' 에서 무대로 삼은 개성을 꼽았다.

"우리 교수선생은 별 요구 없겠죠?" 권영빈 단장은 나의 대학 선배로 20년 전에는 내 직장 상사였다.

그래서 한껏 정을 담아 물은 것이다.

"천만에, 내금강!" "내금강? 그건 안된다고 하던데. " "안되긴! 그러니까 더 가야지. 나라면 보름 일정 중 내금강 하루 하고 나머지 열나흘 하고 안 바꾸겠다. "

내가 이렇게 강하게 나오자 나의 억지를 잘 알고 있는 權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갔다.

지금 우리의 금강산 일정은 외금강에 집중해 있고 해금강이 후식으로 가미돼 있지만 금강산의 역사와 문화유산은 내금강에서 집중적으로 형성돼 있다.

옛 사람들이, 그리고 분단되기 전에 할아버지들이 금강산에 간다는 것은 곧 내금강에 가는 것을 의미했다.

문화유적으로 말하자면 외금강엔 기껏해야 남쪽 기슭에 유점사터, 동쪽 기슭에 신계사터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금강엔 장연사 (長淵寺) 터.장안사 (長安寺) 터.삼불암.백화암.표훈사.정양사.보덕암.마하연.묘길상 등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잠시 뒤 權단장은 협의를 마치고 와서는 백두산.개성은 문제 없는데 내금강은 알아본다고 했을 뿐이라고 했다.

다급해진 나는 호칭부터 바꾸며 달려들었다.

"權선배! 알아보다니? 무조건 간다고 일정을 잡아놓고 봐야지!" "시끄럽다! 길이 없다는데 우찌 가노?" "길이 없긴! 회양군.금강군에 사람이 사는데!" "에그, 예나 지금이나 떼쓰는 건…. " 전관예우는 법조계에서도 3년만 인정하고 있는 것인데 3년이 여섯번을 더 지났건만 그는 나를 옛날 나로 대한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아주 마음놓고 떼도 강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길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통천으로 나가 비포장 흙길로 회양을 돌아 내강리 (內剛里) 로 들어가는 길로 1백20㎞가 더 되니 그건 애당초 안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외금강에서 온정령 너머 내강리로 빠지는 고갯길인데 이 길이 1백8굽이에 46㎞로 장마엔 곧잘 길이 끊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외금강에 가서 상황을 살피기로 하고 빈칸으로 내금강 하루를 잡아놓았다.

그러면 됐나?" 權단장은 경상도 예천 사람이고 경상도 사람이 "됐나?" 하고 나올 때는 된 것이다.

그리하여 외금강에 온 날부터 안내단장 조광주 참사는 연일 길을 알아보느라 바빴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내금강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말은 그렇게 안했지만 당국에 긴급도로 복구를 요구해 길을 열어낸 것이었고, 그 덕에 우리는 분단 이후 남한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내금강에 들어가는 영광과 행운이 열린 것이었다.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날 아침 식당에서 내가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보고 權단장은 흐뭇해 하면서 들어가게 해주었으면 혼자만 좋아하지 말고 내금강 조사해 온 것 좀 풀어보라고 했다.

나는 기꺼이 내금강 가는 옛 길부터 소개하며 내 방송을 시작했다.

1933년 금강산전철회사가 발행한 안내책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경성 (京城) 역에서 경원선을 타고 철원에서 하차해 금강산 전철을 갈아타면 내금강에 갈 수 있습니다.

매년 5월부터 10월까지는 직접 연결해주는 기차가 따로 있고, 일요일.공휴일 전날 밤 10시에 떠나는 2등.3등 침대차는 새벽 6시에 내금강역에 도착합니다.

역에서 장안사까지는 걸어서 20분, 승합버스로 5분 걸립니다.

" 조선시대는 한양에서 떠나면 양주 (의정부).포천을 지나 철원 삼부연 (三斧淵)에서 쉬고, 금성 피금정 (披禁亭)에서 놀고, 창도역 (昌道驛)에 가서 자면 이튿날 단발령 (斷髮嶺)에 오르게 되고, 여기부터가 금강산이다.

단발령에서는 40리 밖의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가 서릿발처럼 하얗게 환상적으로 피어올라 사람들은 머리깎고 중이 돼 거기서 살고 싶어한단다.

그래서 단발령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겸재 정선, 고송 (古松) 이인문 (李寅文) 같은 이는 "단발령에서 본 금강산" , 왈 (曰) , '단발령 망금강 (望金剛)' 이라는 명작을 낳았다.

그리고 장안사에 도착하면 금강산 답사가 시작되니 한양에서 대략 5일 또는 6일을 잡았다.

겉보기부터 약골인 權단장은 얘기중 한숨을 쉰다.

"애고, 기운 다 빠져 금강산 등산을 우에 하노?" "다 길이 있지. 언제 걸어왔나, 나귀타고 왔지. 그리고 지체 높은 자는 회양에 가서 사또 대접 한 이틀 받아 원기 보충해 오고, 금강산에선 중들 시켜 가마타고 다녔어요. " "아니, 못 보면 그만이지 산에 가마타고 가는 못된 놈이 어디 있노?" "어디 있긴? 죄 그랬지. 요새 골프장 18홀을 자동차로 다니는 사람도 있다며. " "맞다! 니는 골프도 안치면서 그건 우에 아노!" "지금 내가 내금강을 가 봐서 얘기하나?" "됐다. "

그리하여 내금강에서 명승지를 닷새 정도 다 둘러 보고 안문령 (雁門嶺) 넘어 유점사 (楡岾寺)가서 사나흘 놀다가 온정리가 나오면 여기서 대개 지쳐 외금강은 안 보고 삼일포.해금강으로 빠진다.

'관동별곡 (關東別曲)' 의 송강 (松江) 정철 (鄭澈) , '동유기 (東遊記)' 의 농암 (農巖) 김창협 (金昌協) , '해악전신첩 (海岳傳神帖)' 의 겸재 (謙齋) 정선 (鄭) , '한국과 그 이웃들' 의 이사벨라 비숍 등이 다 이 코스로 탐승했다.

그리고 '금강4군첩' 의 단원 (檀園) 김홍도 (金弘道) , '동행산수기 (東行山水記)' 의 오당 (悟堂) 이상수 (李象秀) 는 외금강까지 답사했다.

이것이 금강산 답사의 정코스였다.

그래야 금강산이 제대로 보인다고 했다.

정확하게 31일간 금강산 유람을 마친 농암 김창협이 기행문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 것도 여유로운 되새김 끝의 총평인 셈이었다.

"금강산을 다 보고나니 내가 이제까지 반생 (半生) 동안 보았다는 산이란 그저 흙무더기 아니면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았다. " 이렇게 나의 아침 '방송' 을 마치자 고은선생이 들은 값으로 '시가 있는 아침' 에서 한마디하듯 촌평을 내리는데 거기엔 한숨까지 실려 있었다.

"분단된 조국에서 내금강 들어가는 것은 항문으로 내시경 집어넣는 꼴이라니까. "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회는 '장안사터와 삼불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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