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정부, ‘알뜰 살림’ 초심 잊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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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국민 세금을 아껴 달라는 주문은 정말 수없이 많이 했다. 자기 돈처럼 생각하고 나랏돈을 써 달라는 부탁 역시 이제는 신물이 날 정도다. 그런데도 공무원들에게는 마이동풍인 모양이다. 여전히 나랏돈을 ‘남의 돈’인 양 함부로 쓰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최근 내놓은 ‘2008 회계연도 결산분석’ 보고서를 보면 그렇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중복 투자다. 국방부의 군수통합정보체계사업은 당초 한 곳에서 개발하기로 했던 사업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육군과 해군, 국방부 등이 각자 추진하는 바람에 프로그램 개발 비용 등이 중복됐다. 이렇게 낭비된 돈이 수백억원이나 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사업계획을 부실하게 짜는 바람에 나랏돈이 낭비되는 경우도 많다. 인천공항철도가 대표적이다. 수요 예측을 잘못하는 바람에 30년간 나라가 예산으로 물어줘야 할 돈이 무려 14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일단 예산부터 확보해놓고 보자는 ‘예산 알박기’ 현상도 심각하다. 연근해 어업을 구조조정해야 한다며 정부가 타 간 예산은 3000억원이 넘었지만 실제 집행된 돈은 3분의 1도 채 안 됐다. 처음부터 예산 확보용으로 추진된 사업이었다는 얘기다.

정부더러 돈을 쓰지 말라는 건 아니다. 필요한 돈이라면 당연히 써야 한다. 단지 낭비하지 말자는 얘기일 뿐이다. 투입 대비 효과를 따져가면서 가급적 돈을 효율적으로 쓰라는 주문이다. 하물며 이 정부는 알뜰한 정부, 작은 정부를 국민에게 약속하며 출범한 정부 아닌가. 글로벌 경제위기로 사정이 급변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알뜰과 긴축의 마음가짐마저 달라져선 안 된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감세냐, 재정건전성이냐의 선택 문제도 쉽게 풀릴 수 있다고 본다. 재정을 건전하게 하려면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감세 유보나 증세를 요청하기에 앞서 불요불급한 정부 지출부터 구조조정하는 게 우선이라고 본다. 당장 이번에 지적된 중복과 낭비 요인부터 제거해야 한다. 살림을 정말 알뜰하게 사는데도 증세가 필요하다는 정부를 수용 못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