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동의 중국世說] 술 한잔의 지혜 ‘杯酒釋兵權’을 아쉬워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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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황제에 등극한 직후 추밀원(樞密直) 학사인 조보(趙普)에게 물었다. “당나라가 초기엔 이세민의 정관지치(貞觀之治) 등 선정으로 찬양받다가 후기에는 여러 황제가 명멸하며 난세를 맞은 이유가 무언가.” 조보는 “당나라 말기에 황제의 세력은 약하고 지방과 신하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오니, 황제께서도 조속히 신하의 권력을 축소하고 병권을 회수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조광윤은 어느 날 석수신(石守信) 등 무장과 대신들을 모아 주연을 베풀며 “짐은 그대들 덕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마음이 늘 편치 않소, 이 세상에 천자(天子)의 권좌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 나도 대비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내 자리를 찬탈할 것이 아니겠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석수신 등 무장과 대신들은 모두 “저희들이 어찌 감히 황상의 자리를 탐하겠습니까. 천부당 만부당 하신 말씀이오니 저희들이 처신할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조광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인생은 매우 짧아 문틈 사이로 말이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소(人生如白駒過隙). 그러니 그대들도 이 허무한 인생을 풍요롭게 즐기도록 내가 도와줄 테니 병권(兵權)을 내놓고 편안히 천수(天壽)를 다하는 것이 어떠하오“라고 권했다. 신하들이 이튿날부터 바로 병권을 내놓았음은 물론이고 조광윤은 이로써 송나라의 국기(國基)를 다질 수 있었다.
이 고사에서 유래돼 현재도 중국인들은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술을 마시면서 병권을 푼다)’이란 말을 자주 인용하는 데, 하루는 필자가 베이징의 여러 외교관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이 말을 듣게 됐다. 평소 예의도 바르고 매너도 세련된 어느 중국 외교관이 그 날은 술 한잔 하더니, “오늘은 기분이 좋다”면서 “杯酒釋兵權”을 연발하기에 필자가 왜 갑자기 송태조에 얽힌 고사성어를 말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최근에 쓰이는 색다른 해석을 알려주었다. 즉 ‘배주석병권” 이란 문구는 원래 조광윤이 부하들을 무장해제시킨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나, 현재는 상하간 계급장 떼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술 마실 때 사용하는 성어(成語)로도 사용된다는 것이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장군 한신(韓信)을 이용한 후 여태후(呂太后)를 시켜 살해하고,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오(吳)나라에 복수한 후 일등 공신 문종(文種)에게 자살의 검(劍)을 내려 토사구팽(兎死狗烹) 시킨 것과는 비교할 때 조광윤은 평화롭게 정적(政敵)들을 순화, 복종시켰다는 점에서 보다 인도적이고 한 차원 높은 정치전략을 구사했다고 평가할만하다. 여야간 극한적 대립과 투쟁만을 일삼다가 급기야는 국회폭력사태로 해외토픽을 연출하곤 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상대방에게 술 한잔 권하면서 설득과 타협을 모색하는 지혜롭고 성숙된 정치 행태를 보여주면 어떨까.

한형동 산둥성 칭다오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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