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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목욕할 때도 몸 보지 마” 지금은 도처에 넘치는 여성 노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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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프랑스 제5공화국을 건설한 드골 대통령의 부인 이본 드골(1900~1979)은 가톨릭 기숙학교에 다니던 여학생 시절 목욕할 때면 반드시 가운을 걸쳐야 했다. 자기 몸을 볼 수 없도록 하는 학교 규칙 때문이었다. 서양 사회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기독교 전통은 육체를 의심하고 심지어 비난하는 태도마저 갖게 했다. 신체는 영혼의 감옥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육체는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누더기에 불과했다. 물론 육체는 존중돼야 하고 필요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신체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죄, 특히 육신의 죄를 범하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목욕 등 몸단장은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물이 몸을 허약하게 만든다는 믿음도 널리 퍼져 있었다. 반면 몸의 때는 건강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중·고교 기숙사에는 아예 목욕 시설이 없는 곳도 적지 않았다. 그 후 청결 관습은 사회 계층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산층의 아파트에는 대개 욕조가 딸린 욕실이 있었지만, 서민들이 현대적 편의시설을 갖춘 아파트에 입주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다.

몸단장의 도구인 거울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19세기 프랑스 농촌마을에서 제대로 된 거울은 이발사만 갖고 있었고, 남자들만 볼 수 있게 사용이 국한됐다. 여자들은 행상인들이 판매한 작은 거울을 사용했지만 고작해야 얼굴만 비춰 볼 수 있었다. 농촌 사회에는 거울에 대한 금기 사항까지 있었다. 이를테면 아이에게 거울을 보여주면 키가 자라지 않으며, 사람이 죽은 다음 날 거울이 펼쳐져 있으면 불행이 온다는 식이었다.

부유층에서는 거울이 일찍부터 사용됐다. 19세기 말에는 부부 침실 장롱 문에 거울이 등장했다. 그러나 규범에 따라 처녀 아이가 알몸을 거울에 비춰 보는 것을 금지했다. 욕조 물에 비친 나신을 봐도 안 되었다.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방지하기 위해 목욕물을 흐리게 만드는 특수한 가루까지 사용됐다. 하지만 이런 금기는 오히려 육체의 이미지가 갖는 관능적 자극을 더욱 고조시킬 뿐이었다. 상류층을 상대로 쾌락을 파는 장소에 거울이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1890년에 그려진 ‘거울 앞에서’(그림=파리 장식예술도서관)는 전신거울 확산 초기, 자아도취의 감정이 고조되던 세태의 단면을 보여준다. 거리마다 해변마다 노출이 넘쳐나는 계절에 바라본 100년 전 ‘그때’는 완연한 별천지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