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보신'급급한 선진국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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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프랑스 경제학자 장 뤼크 그레오는 오늘의 세계경제를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호에 비유하고 있다.

빙산과 충돌한 타이타닉호의 각 칸에 차례로 물이 차들어오듯 세계경제가 한칸 한칸 물에 잠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경제가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일본.1차산품 생산국들.중국.미국 등 다섯개 칸으로 구성돼 있다고 상정한다.

'호랑이' 로 불리던 아시아 신흥공업국들과 일본은 지난 가을과 겨울을 고비로 이미 물에 잠겼고, 1차산품 생산국들도 거의 목까지 물이 차오른 지경이라고 그레오는 주장한다.

중국 칸으로도 물이 들어와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으며 오직 미국 칸만 아직 온전한 상태라는 것이다.

미국이 버티고 있는 것은 왕성한 내수소비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빚까지 얻어 산 주식이 계속 상한가를 치면서 미국인들은 신나게 소비를 즐겨왔다.

하지만 러시아 사태에서 비롯된 최근의 뉴욕증시 폭락사태는 소비전선에 적신호를 보내고 있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세계경제의 위기 징후를 자본 흐름의 단절에서 찾고 있다.

자본의 빈익빈 (貧益貧) 부익부 (富益富) 현상이 노골화하면서 세계화 속에 사라지는 듯했던 세계경제의 남북간 장벽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의 아이러니다.

이익을 좇아 신흥시장 (이머징 마켓) 으로 몰렸던 자본이 아시아 경제위기를 계기로 유럽.미국 등 안전한 곳으로만 집중되면서 신흥공업국들의 위기탈출을 더욱 어렵게 하고, 결국 세계를 본격적 디플레 (경기침체) 의 수렁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르몽드는 진단한다.

하지만 미국과 서유럽국들은 자기 칸으로만 물이 안들어오도록 하는 데 급급한 모습이다.

미국은 좀더 지켜보겠다는 자세고, 독일은 눈앞에 닥친 총선에 온 신경이 쏠려 있다.

영국과 프랑스도 둑 쌓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장벽 너머로 돈이 다시 굴러갈 수 있도록 선진국들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통제불능의 '시장력' 만 탓하며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언제 세계경제가 침몰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배명복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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