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지 않고, 지우고 비워 드러내는 산수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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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호 06면

1 인왕산도 (2009), 캔버스에 아크릴, 먹, 123x213cm 2 자연의 기억 (2009), 캔버스에 아크릴, 먹, 130x130cm 3 자연의 기억 (2009), 캔버스에 아크릴, 먹, 130x130cm

그는 그리지 않는다. 채운 화폭을 지우고 비운다. 한국화가 석철주(59·추계예술대 교수) 얘기다.그의 방식은 독특하다. 화선지 대신 캔버스를, 먹 대신 아크릴 물감을 쓴다. 16세부터 청전 이상범 밑에서 전통 산수화를 그렸지만 이미 그때부터 “먹 말고 다른 재료를 써봐야지” 하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방법은 이렇다. 형형색색으로 바탕을 칠해 놓은 캔버스 위에 흰색을 칠한다. 그 흰색이 마르기 전에 특수액체에 적신 붓으로 대상을 그린다. 그럼 그 부분은 흰색이 지워지고 바탕색이 드러난다. “종이에 배어 나오는 먹은 깊이감이 있고, 캔버스에 바르는 아크릴은 발색이 선명하죠. 아크릴에 수묵의 깊이를 주기 위해 칠하고 지우는 방법을 씁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는 선현의 그림을 재해석한다. 18세기 강희언의 36.6x53.7㎝짜리 수묵 ‘인왕산도’는 그의 손길을 통해 123x213㎝짜리 거대한 캔버스로 다시 태어난다.

붓만 쓰는 것도 아니다. 대나무나 혁필, 판화 제작 도구인 스퀴즈를 이용해 긁어 내기도 한다. 학고재 본관 뒤편 신관에 걸린 ‘자연의 기억’ 연작은 이런 방식으로 재현됐다.

“장독 표면의 질감을 화폭에 살려내기 위해 아크릴을 처음 사용했다”는 그는 “작가는 재료의 특질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림을 걸어놓는 위치도 눈여겨볼 만하다. 산수화는 멀리서 풍경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도록 관람객의 눈높이보다 약간 높게,

반대로 들풀 그림은 발아래 펼쳐진 들판의 느낌이 들도록 전시장 바닥에 가깝게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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