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고통분담의 십자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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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폴 클르렐이라는 희곡 작가는 십자가 인생의 실패한 모습을 '비단신' 이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한 예수회 선교사가 탔던 배가 망망대해에서 해적 일당에 의해 격침됐다.

배에 탔던 사람들은 저마다 배 위에 있는 그 무엇이든지 손에 거머쥐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선교사 역시 배의 한 들보에 눕혀 바다 위로 떠다녔다.

오로지 십자가 나무위에 자기 인생을 의지한 이 선교사에겐 점점 바닷속 깊이 가라 앉는 것과 같은 실의와 시련의 밀물만 휘몰아쳤다.

실패로만 보이는 이 십자가를 잡은 자의 마지막 독백은 이러했다.

"주여 나를 이렇게 십자가 나무를 붙잡게 해주셨으니 감사드리나이다.

때로는 주님의 분부가 짐으로만 여겨지고 주님의 계명 앞에 내 뜻을 펼 바를 몰라 암담했습니다.

이 몸의 어느 지체를살펴 보아도 주님께로부터 조금이라도 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나이다.

이제 정말로 십자가 나무에 달려 있으나 내가 매달려 있는 이 십자가만은 아무 것에도 달려 있지 않나이다.

다만 바다위로 떠다닐 뿐이며 아직은 바다가 현 시각의 권세이며 위험임을 알고 있나이다.

비록 이 세상이 실패작이라고들 하는 십자가만이 하느님과 나를 하나로 묶어주고 부활신앙의 승리가 있긴 하지만 아직은 우리 손에 잡히는 것부터 차지하겠다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하나이다.

" 지금 우리는 난파당한 우리 경제의 파고에 우리 국민 각자가 져야만 할 고통분담의 십자가 나무를 지고 떠다닐 뿐이다.

그 고통의 십자가 나무를 떠나서는 우리 모두와 우리 경제가 침몰하게 될 것 같은 한 운명에 처해 있는 절박한 현실이다.

구원될 수 없는 물질만 거머쥐고 있는 경영자들이나 고통 분담의 십자가를 왜, 어째서 나만 지느냐고 내동댕이쳐버리는 노동자들이나 '고통 분담의 십자가를 너나 져라' 는 식의 자세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의 생명체인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돼 있는 유기체다.

내 손과 발은 나의 심장에 딸리지 않았으니 더 이상 심장을 위해, 먹을 것을 위해 손과 발이 닳도록 수고하지 않겠다고 동맹파업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그때의 내 심장과 위장은 더 이상 제기능을 다 할 수 없어 같은 생명을 나누는 유기체인 내 손과 발과 입 등의 지체들마저 기진맥진해져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와 사회공동체도 우리 몸처럼 같은 사회적 생명을 나누는 유기체적 공동체다.

마치 우리 경제는 수술해야만 회생되는 중환자 상태와 같다.

어떻게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수술을 해야 우리 경제가 소생할 수 있느냐, 이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다.

우리들이 운동이나 게임을 하더라도 운동.게임 규칙이 같아야만 같이 그 운동.게임을 할 수 있듯 자유시장 경제 운영체계 규칙과 틀을 다시 짜 같은 경쟁의 규칙으로 하자는 것이 구조조정이며 개혁 수술일 것이다.

이같은 경제구조와 운영체계로 변하지 않는다면 자유경쟁 경제를 더불어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 국제통화기금 (IMF) 의 구조조정 및 개혁수술 요구다.

따라서 수술할 중환자 상태의 우리 경제가 소생.회복되기 위해서는 수술할 수밖에 없는 지체들을 실기 (失機) 하지 않고 수술하는 용단을 내리고 각 지체들은 고통분담의 십자가를 지는 사랑의 정신이 절실히 요청된다.

수술할 의사는 최소한의 지체를 정리해고 수술함으로써 중환자의 생명을 소생시키느냐, 아니면 수술할 지체를 수술하지 않음으로써 중환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느냐를 놓고 섬세한 검토와 시술이 요구된다.

내년에는 경제공황과 세계 식량난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70년대 이전의 생활 자세로 1년~1년반 만이라도 고통 분담의 십자가를 지고 산다면 우리는 IMF 중환자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자 테이야르는 "십자가는 고된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진보와 승리의 상징이며 한 생명을 낳는 산고" 라면서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는다면 결코 인생을 슬프고 귀찮은 것으로 생각지 않을 것이며 오직 이해할만한 삶의 존엄성에 더욱 마음이 쏠릴 것" 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 국민 모두는 고통 분담의 산고로 우리 경제 회생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안충석(사당동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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