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디지털 원주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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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1996년에서 온 남자에게 2032년의 여자가 사랑을 나누길 청한다. 반색했던 것도 잠시. 특수 헤드기어를 끼고 디지털로 전환한 성 에너지를 교환하자는 말에 남자는 난감해진다. “그냥 ‘옛날식’으로 하자”며 우겨보지만 여자는 몸을 섞는 진짜 섹스는 비위생적이라 용도 폐기된 지 오래라고 쏘아붙인다. 인류의 묵시록적 미래를 그린 영화 ‘데몰리션 맨(Demolition Man)’의 한 장면이다.

e-메일이 편지와 엽서를 퇴물로 만들고, 닌텐도 위(Wii) 게임이 테니스와 야구시합 자리를 꿰찬 걸 보면 가상 섹스가 먼 미래의 일만도 아닌 듯하다. 이미 이웃집에 놀러 가는 대신 친구도 마이 스페이스나 페이스 북 같은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에서 사귀는 세상 아닌가.

엄마 배 속에서부터 웹서핑을 배우고 돌잡이로 마우스를 움켜쥔 젊은 세대라면 더욱 그렇다. 미국 교육학자 마크 프렌스키는 2001년 이들을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s)’이라 명명한 논문으로 이목을 끌었다. 특정 지역 원주민들이 그곳 언어와 문화를 생득적으로 익히듯 요즘 아이들은 디지털 습성을 타고난다는 것이다. 반면 이전 세대는 ‘디지털 이주민(Digital Immigrants)’이라 했다. 아무리 애써도 원주민 억양을 따라잡을 수 없는 이주민들처럼 아날로그 취향을 아예 떨치진 못한다는 거다.

구글의 CEO 에릭 슈미트가 지난 5월 미 펜실베이니아대 졸업식 축사에서 양쪽의 차이를 설파했다. “우리 땐 창피한 일을 겪으면 애써 쉬쉬했는데 여러분은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기 바쁘더군.” 그는 ‘이주민’ 세대가 ‘원주민’ 세대를 바라보는 노파심도 드러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끄고 주변 사람들을 좀 돌아봐라.” “가상이 아닌 진짜 세계와 맞닥뜨려라.”

사람들을 컴퓨터 앞에 붙들어 앉힌 장본인이 ‘아날로그로 돌아가라’고 외치다니 흡사 병 주고 약 주는 격이다. 작금의 세태가 그의 눈에도 지나치다 싶었나 보다. 생뚱맞다 할지 모르지만 지난 한 주 우리 사회를 뒤흔든 디도스(DDoS) 사태 역시 디지털 만능주의에 대한 경종이 아닐는지. 치명적인 취약성이 드러난 사이버 세상에서 살아가자면 보험 드는 셈치고 날로 잊혀 가는 아날로그 본능을 되살려야 할 것 같다. 전화번호를 외우고, 손글씨도 쓰면서 말이다. 물론 사랑도 아날로그로 나누고….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