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제2건국'이 성공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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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제2의 건국을 제창하고 총체적 국가개혁을 통해 이를 실현하겠다고 다짐했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연설에서 경제공황에 시달리고 있는 1930년대의 미국민들에게 두려움을 버리고 다시 일어설 것을 호소했던 장면을 연상시키는 메시지였다.

사실 우리나라는 지난 50년간 국가형성기와 경제건설기를 거치면서 권위주의적인 지배구조를 고착화시켰고, 이는 정경유착.부정부패.관치 (官治) 금융의 심화현상을 수반했다.

따라서 정치.경제.사회 등 전분야에 걸쳐 효율성이 저하됐고,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로 상징되는 경제위기도 이런 구조적 모순과 잘못된 관행에서 이미 예고됐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현시점에서 총체적 국가개혁은 불가피하며, 이는 해방후 건국을 하던 당시의 비상한 정성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는 또 우리가 흔히 보아 왔던 '일과성 사정' 이 아닌 '구조적 개혁' 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金대통령이 제2의 건국을 선언하고 법통면에서는 상해임시정부를 계승하면서도 통치이념과 통치방식면에서는 역대정부와 구별되는 새로운 국정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민족사적 흐름을 정확하게 인식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金대통령은 그의 정치철학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을 거듭 강조하고 참여민주주의 신장, 관치경제 지양, 세계주의 추구, 지식사회 건설, 신노사문화 창출, 남북교류협력 활성화 등 6대 과제의 실천을 통해 나라의 모습을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대통령이 국가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함에 있어 과거에 비해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시책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실천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심어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정책의 추진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아 염려스러운 점도 없지 않다.

정치분야와 관련해 金대통령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과 주민투표제 등 다양한 개혁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정치권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걱정스럽다.

경제분야에서는 시장자율을 강조하고 있지만 시장만능주의가 갖는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도 우려된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지양하고 보편적 세계주의로 나아가자고 주장한 대목은 설득력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서구적 가치와 한국적 가치와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지가 주목된다.

남북문제에서 확고한 안보를 바탕으로 화해협력을 활성화하겠다고 주장한 것은 객관적 상황인식에 근거한 합리적인 접근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이 끝내 대남 (對南) 적화통일 전략을 포기하지 않을 때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북한을 대해야 할 것이다.

제2의 건국선언이 갖는 또 다른 특징은 국가개혁의 추진전략이 국민운동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金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국민운동' 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주의해야 할 점은 그것이 예산을 축내는 또 하나의 관변단체로 전락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대통령도 언급했듯 개혁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반국민의 동참은 물론 정치권, 특히 야당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관료층이 개혁의 선도역할을 자임하고 나서야 한다.

미국도 1930년대에는 희망이 없는 절망의 나라였다.

전대미문 (前代未聞) 의 경제공황으로 은행과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고, 실직자가 거리를 메웠으며, 인플레가 극심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과감히 추진함으로써 미국경제는 회생했고, 급기야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최강국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과 의회가 그의 정책과 지도력을 믿고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가 의회에 제출하는 개혁입법은 대부분 신속하게 통과됐다.

정치인들이 공황극복과 개혁추진을 당리당략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고통분담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관료들도 헌신적이었다.

지금 한국은 어떤가.

개혁입법이 국회에서 잠자고, 그나마 입법화된 개혁조치들도 관료들의 무사안일 속에서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정치인과 관료들을 욕하는 국민들 역시 방관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을 뿐이다.

개혁은 대통령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정부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일이고, 국가를 위한 일이다.

국민은 방관적 자세를 버려야 하고, 정치권은 정쟁을 중지하고, 관료들 또한 복지부동에서 깨어나야 한다.

김호진(고려대 노동대 학원장.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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