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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화유산답사기]2부-1.금강예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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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2월부터 7월까지 본지에 '유홍준의 북한문화유산 답사기' 를 연재했던 유홍준 (兪弘濬) 교수가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제3차 방북조사단원으로 다시 북한을 다녀와 오늘부터 매주 토요일 같은 타이틀로 제2부를 연재한다.

편집자

꿈에나 그려본다는 것조차 꿈같이 생각되던 금강산을 정말로 다녀왔다.

이런 것을 일러 꿈같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금강산은 내게 여전히 하나의 꿈으로 남아 있다.

금강산은 신의 조화로움이 극치에 달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화려할 수 없고, 그렇게 기묘할 수 없고, 그렇게 완벽할 수 없다.

산봉우리도, 바위도, 계곡도, 나무도, 심지어 산길조차 기왕의 내 시각적 경험과 상상력을 훨씬 넘어서 있다.

그런데 내가 비오는 여름날 고작해서 엿새동안 본 것이란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 일천이백 골짜기의 백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 한 것일지니 나로서는 금강산은 아직도 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금강산과 각별한 인연은 없었지만 제깐에는 제법 공부해서 안다고 생각해 왔다.

내가 처음 금강산에 대한 글을 읽고 크게 감동받은 것은 정비석 (鄭飛石) 의 '산정무한 (山情無限)' 이었다.

대학입시 국어시험 공부를 위해 반강제로 읽히던 이 낭만의 기행문은 비록 어려운 한자들로 수험생들을 어지간히 골탕먹였지만 딱딱한 교과서체 문장에 지쳐있던 젊은이들에게 청신한 바람으로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문 (美文) 은 본래 독자로 하여금 그 글이 노래한 대상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드는 법이었다.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거니 눈이 떠진 것은 몸에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 (靈峯) 들을 대면하려고 새댁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 (峻峯) 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하게 자태 (姿態) 를 엿보일 성싶지 않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간 뒤 나는 한국미술사를 전공하면서 불가불 조선시대 진경산수화 (眞景山水畵) 를 공부하게 됐고 이로 인해 금강산은 내 연구의 한 부분이 됐다.

진경산수를 창시한 겸재 (謙齋) 정선 (鄭) 이 웅혼한 필치로 그린 '금강전도 (金剛全圖)' '만폭동' '정양사' 같은 한국미술사의 고전적 작품들, 단원 (檀園) 김홍도 (金弘道)가 완숙한 필치로 그려낸 '금강사군첩 (四郡帖)' '총석정' '묘길상' '구룡폭' 같은 불후의 명작들, 그리고 소정 (小亭) 변관식 (卞寬植) 이 패기에 찬 붓놀림으로 감동적으로 담아낸 '옥류동 (玉流洞)' '삼선암' 같은 대작들…. 이런 대가들의 그림을 통해 나는 금강산의 구석구석을 익히게 됐다.

그 점에서 그림은 시나 음악보다 유리한 예술이었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 사진기 몫까지 대신하고 있는데 사진과는 달리 과장과 상징을 통해 더 실감나고 감동있게 표현할 수 있는 장르상의 특징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간혹 금강산의 실경 (實景) 은 이 그림들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 해보기도 했다.

한편으로 나는 이 대가들의 금강산 그림을 보면서 자연미가 예술미로 승화되는 미적 작용에서 예술가의 눈과 손이 갖는 의미를 따져 보게도 됐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뜨거운 애정 없이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며 자연과 국토에 대한 사랑이란 곧 "아! 아름다워라, 조국 강산이여!" 라는 조국애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또 내 전공과 취미에 따라 금강산의 옛 답사기들도 두루 훑어 보아왔다.

갈 수 없는 그 곳의 기행문을 제대로 읽기 위해 통문관 (通文館) 이겸로 (李謙魯) 선생께 부탁해 진작부터 일제시대에 간행된 금강산 탐승 안내책과 사진첩을 5권이나 구해 곁에 놓고 지리를 익혀가며 손가락 점찍으면서 읽기도 했다.

특히 영조 때 김창협 (金昌協) 의 '동유기 (東遊記)' 는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는 글이었고, 김삿갓의 금강산 시구들은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게 하는 절창 (絶唱) 이 많았다.

그런 중 금강산에 대한 최고의 예찬은 이사벨라 비숍과 육당 (六堂) 최남선 (崔南善) 의 '금강예찬' 이었다.

비숍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들' 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세계 어느 명산의 아름다움도 초월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쓴 글은 한갓 목록에 지나지 않는다.

미의 모든 요소로 가득찬 이 대규모의 협곡은 너무도 황홀하여 사람을 마비시킬 지경이다."

이를 능가하는 찬사가 또 있을까? 육당은 '금강예찬' 의 머릿글에서 하늘나라 수미산상의 제석궁 앞마당에서 인간세계의 산왕 (山王) 을 뽑는 희곡 형식의 콩트를 제시했다.

여기서 중국의 곤륜산, 인도의 히말라야산, 미국의 로키산, 유럽의 알프스산을 제치고 금강산이 산왕으로 추대되는 과정을 묘사하고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은 보고 느끼기나 할 것이요, 형언하거나 본떠낼 것은 못됩니다.

하느님의 의장 (意匠)에서도 지극히 공교한 것이어늘 사람의 변변치 아니한 재주를 어디에 시험한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금강산에 대한 예찬은 이 세상 모든 찬사의 극을 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직접 금강산에 가서 보니 그 모두가 결코 허사 (虛辭)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시도, 그림도, 노래도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묘사된 예술보다 대상 그 자체가 더 위대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내 눈에만 그렇게 비친 것이 아니었다.

함께 한 시인과 소설가의 눈에도 똑같이 비쳤다.

육담 (肉談)에는 능해도 감정에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 소설가 김주영 (金周榮) 선생도 옥류동 계곡에 들어서서는 "나는 킬리만자로산까지 가 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있으리란 상상을 못했다" 고 혀를 둘렀다.

사실주의.민족주의.낭만주의가 하나로 육화 (肉化) 되어 내던지는 말 한마디가 곧 시로 되는 신묘한 경지의 시인 고은 (高銀) 선생은 만물상의 기기묘묘한 영봉을 치켜올려다 보고는 이렇게 영탄조로 말했다.

"아! 미치겠구나! 이런 절경을 보고도 실성하지 않는 놈이 있으면 그 놈이 실성한 놈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즉발적인 감탄의 말조차 남기지 못한 채 금강산을 떠나고 말았으니 별 수 없이 육당의 교시를 묵수한 셈이런가.

그런데 보름간의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작곡가 강준일선생의 음악캠프에 가 있는 작은 아들을 보러 갔다가 강선생이 금강산이 정말 멋있더냐고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게 조건반사로 튀어나온 답이 있었다.

"진짜로 완벽한 아름다움이에요. 모차르트, 모차르트도 그런 완벽한 기교의 모차르트는 있을 수 없죠." 한마디로 줄여 말해 금강은 오직 탄미의 대상일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 부칠 수 있는 인간의 노래로는 일찍이 송나라 소동파 (蘇東坡)가 말한 열글자 "원생고려국 (願生高麗國) 일견금강산 (一見金剛山)" 이상이 없을 것 같다.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한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은 '온정리 소견 (所見)'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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