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구조조정 태풍 '고려금융왕국' 꿈 침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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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생보사 퇴출 발표에 땅을 칠 기력마저 상실한 사람이 있다. 80년대 이후 '고려 금융왕국' 건설을 꿈꿨던 이강학 (李康學.78) 고려통상그룹 명예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12월 영업정지된 고려종금을 시작으로 고려증권.고려생명 등 李명예회장이 세운 금융기관은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이후 금융산업 구조조정의 격랑이 일 때마다 예외없이 퇴출 대상이 돼야 했다.

李명예회장은 해방 후 직업 경찰로 출발했다. 일본대.미국 남부캘리포니아대 유학 경력을 지닌 그는 이승만 (李承晩) 당시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30대 중반의 나이에 치안국장 자리에 올랐다.

치안국장 당시 벌어진 4.19로 2년반 동안 감옥살이를 한 후 李씨는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일본인 친구의 권유로 원양업에 진출, 막대한 부를 쌓는 행운을 잡았다.

70년대 들어서도 李씨의 사업은 계속 번창했다. 명동 사채 시장을 주무르는 큰손이라는 풍문이 떠도는 가운데 현재 고려생명 본점이 있는 대연각 빌딩, 명동 중심부에 위치한 개양빌딩 등을 사들이며 부동산 사업에도 손을 댔다.

李씨의 금융업 진출은 지난 78년 고려증권의 전신인 대아증권을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출발은 매우 좋았다.

특히 85~89년 국내 증시 대세 상승기 당시에는 수천억원의 돈을 긁어 모을 수 있었다.

종합금융그룹 건설의 꿈은 이때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금융산업이야말로 미래의 성장산업이라는 판단 아래 83년 고려종금의 전신인 반도투금을 설립한데 이어, 87년 고려종합경제연구소.88년 고려투자자문 (현 고려투자신탁운용) 을 세웠다.

보험시장 개방 1년 후인 89년에는 미국 생보사와 합작으로 고려생명을 설립, 보험업에도 진출했다.

그러나 경영전략은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 고려통상그룹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의 말이다.

재경부나 감독원 출신 인사를 임원으로 채용한 후 이들의 로비력을 이용, '리스크 매니지먼트' 를 했다는 것이다.

치밀한 전략 없이 금융시장의 문호가 넓어질 때마다 무작정 발을 들이민데 따른,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는 비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룹 내부의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고 한다. 형식상으로는 李명예회장의 아들 창재 (彰宰.47) 씨가 경영전반을 책임지는 것으로 돼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李명예회장이 전권을 행사하는 막후조종 체제였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정작 李명예회장에게는 금융 계열사의 영업실적이 있는 대로 보고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이렇다보니 경영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는 것.

시련은 90년대 들면서부터 시작됐다. 대표선수격인 고려증권은 90년대 이후 증시침체가 계속되면서 적자 영업에 시달렸다.

그 결과 지난 95, 96년 2년 동안에만 총 1천3백76억원의 적자를 냈다.

고려생명은 생보업계의 과당경쟁으로 인해 설립 이후 흑자를 낸 적이 전무하다 할 정도였다.

투금 시절 짭짤한 이익을 냈던 고려종금 역시 종금사 전환 이후 해외영업에 무분별하게 뛰어들어 막대한 손해를 냈다.

'고려금융왕국' 은 지난해 12월 2일 고려종금이 1차 영업정지 대상에 포함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흘 뒤인 5일 고려종금에 1천5백억원을 빌려줬던 고려증권은 이 돈이 묶이면서 금융기관 중 사상 처음으로 부도를 냈다.

8개월 뒤에는 고려생명마저 사실상 예정됐던 퇴출리스트에 올랐다.

박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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