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세’ 이름의 덫에 걸려 … 선악 논쟁에 휩싸인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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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명명(命名)의 힘은 세다. 지난해 한나라당이 야심 차게 내놓았던 ‘중점 추진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은 민주당이 이를 ‘MB악법’으로 명명했기 때문이다. ‘악법’이란 프레임(틀)이 씌워지면서 내용을 차분하게 따져보는 과정은 생략된 채 찬반, 선악 논쟁에 휩싸인다.

최근 여야 간 프레임 싸움이 붙은 곳이 또 있다. ‘죄악세’란 이름이 붙은 담배·술 소비세 문제다. 지난 8일 조세연구원이 ▶담배와 술에 붙는 세금을 올리고 ▶전세보증금에 임대소득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발표한 게 발단이었다. 정부가 발주한 연구의 공개 토론회 자리였다.

조세연구원은 이날 토론회에서 “한국의 담배 및 주류 관련 개별소비세 체계는 죄악세(Sin Tax)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흡한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죄악세란 사회적으로 억제할 필요가 있는 담배나 술·도박 등에 일부러 매기는 징벌적 성격의 세금을 말한다. 영어단어를 그대로 번역한 말이다.

그러자 즉각 “술·담배를 하는 사람은 죄인이란 말이냐”는 반발이 나왔다. 자유선진당 이상민 정책위의장은 9일 “죄악세 운운하는 것은 납세자를 죄인 취급하는 것으로 그 정당성마저 인정받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그는 “조세저항이 적은 간접세 인상으로 세수 차질을 메우려 는 꼼수”라며 “징벌세를 인상하려면 먼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논란이 커지자 원윤희 조세연구원장은 9일 “단어 자체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급적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보다 가치 중립적인 개념이 무엇인지 전문가들과 논의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부자들은 신나게 세금 깎아주고 구멍 난 국가 재정을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메우겠다는 발상”(김유정 대변인)이라고 비난했다. 지난해 9월 종부세 논란 때 들고 나온 ‘부자 감세’에 이은 ‘서민 증세’의 새 프레임이다. 김 대변인은 “서민 증세를 추진하면서 민생을 앞세우는 서민정권이라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죄악세는 서민들에게 죄짓는 일”이라고 논평했다.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에는 ‘죄악세 부과 논란’ 테마가 만들어졌다. 아이디 ‘레이짱’을 쓰는 네티즌은 “기본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가스요금·술값 등이 오르면 물가도 같이 오르고 그럼 서민들 생활이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민 증세 논쟁이 불붙자 한나라당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김성조 정책위의장은 10일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술과 담배에 대한 증세는 서민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 논의가 중단되기를 희망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조세연구원의 토론회가 열린 지 불과 3일 만의 일이다.

김 정책위의장은 비과세 감면 축소에 대해서도 “서민·농어민·영세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은 계속돼야 하며 축소가 필요하다면 고소득층과 대기업 지원을 우선 축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에도 하반기 경제운용 방향과 관련한 당정협의에서 이 같은 내용을 정책에 반영하도록 기획재정부에 강하게 주문한 적이 있다.

한나라당 정책위 소속의 한 의원은 “한국의 담뱃값은 동유럽권 국가보다 싼 데다 여성과 청소년층 흡연이 늘고 있어 규제가 필요했던 사안”이라며 “그러나 정론(正論)과 여론(輿論)이 다르다”고 고충을 전했다. 한나라당은 전세보증금 과세는 현재 과세하고 있는 월세와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3주택자에 한해 실시하기로 했다.

선승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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